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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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색 결혼식

2007-07-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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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객들이 자리를 메우고 시간이 돼 가족들이 앞자리에 앉을 때까지 주례가 등장하지 않았다. “교통사정으로 늦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족석에 잠시 앉아 있던 신랑의 아버지가 천천히 주례석으로 올라가는 것 아니가. 하객들은 어리둥절한 채 걱정스런 시선으로 신랑 아버지를 주시하고 주례석에 선 신랑 아버지는 하객들을 마주본 채 젊잖게 서있었다.
맨 먼저 남녀 들러리가 등장해 목각 원앙 청둥오리 한 마리씩을 의전 테이블에 놓았다. 나머지 들러리들이 모두 제자리에 서고 화동들이 귀여운 모습으로 주례 앞에 섰을 때 신랑 아버지가 신랑 신부의 입장을 선언했다. 그제야 하객들은 무언가 이색적인 절차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신부 등장도 여느 결혼식과는 달랐다. 신부 아버지의 에스코트를 받고 입장하는 대신 행복 가득찬 모습의 신랑 신부는 손에 손을 마주 잡고 함박꽃 웃음 가득한 채 하객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인사를 하며 입장했다. 주례 앞에 다가 와 예를 갖추는 모습에는 장난기와 정중함이 같이 묻어났다.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주례는 자기 아들의 결혼식의 주례를 서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제일 잘 아는 분을 주례로 모시고 싶다는 아들의 간곡한 요청에서였단다. 주례는 의전 테이블에 나란히 놓여 있는 원앙 청둥오리가 상징하는 숨은 뜻을 설명하고 신랑 신부로 하여금 그 원앙 청둥오리를 서로 마주보게 놓으라고 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그 목각 청둥오리의 모습은 다정함 이상의 것을 느끼게 했다. 곧 이어 미리 준비한 정화수로 신랑 신부가 차례로 각기 손을 씻는 의식이 행해졌다. 결혼이란 영혼과 육신을 항상 정결케 해야 하는 성스러운 것임을 아버지 주례는 설명했다.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차례가 끝나자 아버지 주례는 성혼 사실을 천지신명께 고하는 축문을 큰 목소리로 읽고 나서 신랑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얼마 전 대너포인트의 한 유명 비치 리조트 클럽의 론그라운드에서 열린 이 결혼식의 ‘아버지 주례’는 테메큘라에서 토목회사로 큰 성공을 거둔 한인이다. 결혼식 후 열린 피로연의 화제는 단연 바로 직전 치러진 이색 결혼식이었다. 초청 하객이 양가 부모의 친지들보다 신랑 신부의 친구 또는 지인으로 한정하다 보니 주로 비한인이 많았으며 예식 자체도 영어로만 진행되었다.
하객 중 한 사람인 착 워싱턴 테메큘라 시장은 “아버지가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선 것도 흔치 않은 것이지만 한국의 전통예식을 가미한 이 특이한 절차의 결혼식을 통하여 한국의 그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참석자 모두의 기분을 좋게 해 준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이종운 / 본보 인랜드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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