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구나무 서기

2007-06-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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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 달린 화장실의 거울 앞에 화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어느 집이나 매 한가지일 것이다. 신혼부부라면 멋 진 의자도 있고 각가지 좋은 화장품과 향수들이 진열되어 있을 법 하지만 우리 집 매스터 침실에서 그런 풍경이 사라진 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우리 부부는 은퇴 연령이 지났음에도 계속 일하면서 늘 바삐 지내는 터라 이를 증명이라도 하 듯 화장대 위에는 꼭 필요한 몇 가지 품목만이 단출하게 놓여있고 필자의 유일한 화장품인 로션이 그곳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민 와서 처음 쓰기 시작한 화장품이 ‘올레이’라는 상표의 로션인데 품질이 좋고 값도 비싸지 않아 계속 사용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로션이 요 며칠 똑바로 서있지 않고 거꾸로 서있는 것이다.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로션이 바닥이 날 때쯤 되면 쉽게 나오질 않아 툭툭 치고 흔들고 요란을 떤 후에야 쓸 수 있기 때문에 보관 시 거꾸로 세워놓아야 금방 나오고 끝까지 사용할 수가 있다. 화장품을 물구나무서기까지 시키면서 써본들 얼마나 더 절약할 수있을까마는 이런 방법 을 쓰는 것은 순전히 아내에게 물건을 아껴 쓰고 있음을 과시하려는 전략이다.
물구나무서기는 원래 몸의 균형과 민첩성 을 향상하기 위한 체력단련의 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인데 거꾸로 서는 운동인 만 큼 매우 힘이 드는 자세이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 치고 물구나무서기 기합에 혼쭐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하면 세상이 거꾸로 보이게 된다. 비록 반대로 보여도 시선 또한 같은 방향에 두고 있기 때문에 똑 바로 서서 볼 때처럼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데 실제는 사물을 인식하고 판별하는 데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한국은 세상을 거꾸로 보는 자들 때문에 온 국민과 나라가 혼돈과 미망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푸른 호수에 거꾸로 비쳐진 하늘과 구름, 숲과 나무는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다만 신기루일 뿐 그것을 잡으려는 인간들은 본인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 게 고통과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서있거나 비뚤어진 물건은 바로 놓으면 곧 해결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철학, 가치관과 품격은 금방 형성 되지도 않지만 바로 잡기도 힘이 드는 일이다. 이렇듯 한 나라의 국민성과 그 민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상시 인성교육에 역점을 쏟아 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은 유래 없는 경제성장으로 물질 세계는 1세기 빨라졌을지 모르나 정신세계는 오히려 그만큼 후퇴한 감이 역역하다. 한국의 혼탁한 사회상은 국민의 굴절된 의식구조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시론과 양비론이 환영받는 흐리멍덩한 가치관과 대선에서 김대업이 이회창을 이기는 풍토에서는 결코 건강하고 명랑한 정의사회를 구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 규범과 질서가 붕괴된 것은 마약과 범죄보다도 더욱 세상을 파멸시키는 ‘악의 축’이 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별력 없는 사람들은 세상을 거꾸로 만들려는 인간들의 달콤한 유혹과 그럴듯한 미사여구에 속아 물구나무서기 대열에 끼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이 달리 보이니 재미있고 즐거울 것이다. 머지않아 팔에 힘이 들고 머리에 피가 몰려 의식이 몽롱해질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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