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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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에서 만난 수사들

2007-05-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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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로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중에서>

세상사의 한 가운데 회의하고 방황하는 나의 삶에 친구가 우연히 두고 간 성경 구절이 어느 추운 겨울날의 기억으로 나를 깨운다.
전시 관계로 작품을 들고 뉴욕 공항에 내린 나는 며칠간 묵기로 한 친구 집이 있는 할렘가로 향했다. 친구는 다른 도시에 갔고 열쇠를 전해주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어두운 거리는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지저분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추위에 떨며 세시간을 기다려도 열쇠를 전해주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오는 중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서 옆 건물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어 들어간 집은 난생처음 서 있던 할렘가의 공포스러움과는 너무나 다른 광경이었다. 반짝이게 닦아놓은 마루,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높은 천정의 하얀 벽을 배경으로 후드가 달린 긴 회색 옷에 허리에는 새끼줄을 두르고 맨발을 한 수사들이 부지런히 마루를 닦고 있기도 하고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했는데 그 추운겨울에 맨발인 채 활달히 웃으며 맞아주었다.
우선 배가 고플 테니 요기부터 하라고 수사원장이 나와 손수 스파게티를 담아주었다. 그곳은 프란시스칸 형제회에 처음 들어온 청년들을 수련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몇달 수련 후 온두라스, 런던, 뉴욕에 있는 형제회에 소속되어 나간다고 했다. 아주 좁은 의자가 스무 개쯤 있는 이층 성당을 보여 주었는데 스스로 만든 의자들이었다.
눈부시게 깨끗한 이 건물은 그들이 손수 고치고 다듬은 집이라고 했다. 방금 전에 서있던 할렘가와 그곳에 있는 분들이나 장소의 정결함이 너무나 달라 놀랍기만 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워도 이렇게 보이지 않게 세상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초심의 사람들이라 눈빛이 맑았다.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성 프란시스코는 극도의 청빈과 겸손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섬겼고, 당시 부패했던 교회를 쇄신한 위대한 영성의 성인이다.
최초로 그리스도의 다섯 상흔이 그의 몸에 나타났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와 대화하는 등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 성자로서 그의 가르침은 프란시스코 작은 형제회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스페인화가 주바란(Zurbaran)의 ‘묵상 중의 성 프란시스코’<사진>는 기도중의 황홀경과 죽음에 관한 묵상을 그린 걸작이다.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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