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육칼럼 ‘공부 좀 더해도 되나요?’

2007-02-1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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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스는 현재 10학년에 재학하고 있는 멕시코계 이민학생이다. 지난번 성적표에 영어와 역사 과목에서 C를 받은 이유를 ‘해명’하라는 나의 요구에 칼로스는 다음과 같은 고달픈 생활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이다.
자연히 집안 일은 칼로스와 한살 위인 누나의 책임이 된지 오래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아버지 어머니가 올 때까지, 어린 두 동생 돌봐주고, 청소하고, 저녁 준비하느라고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10시만 되면 칼로스의 아버지는 공부 그만하고 빨리 자라고 야단을 쳐서 할 수 없이 부모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다시 불을 켜고 공부를 계속한다는 얘기였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또 하루 종일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청소를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밀린 공부를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주말에는 으레 아들과 함께 일하러 가는 것으로 정해 놓은 아버지에게 공부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부모는 공부 좀 그만 하라고 하고, 아들은 공부 좀 더 하려고 애를 쓰는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물끄러미 칼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들을 격려해 주지는 못할망정, 집안일을 돕거나 아버지 돈 버는 일에 따라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공부를 못하게 하는 부모에게 원망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얘기하는 그의 얼굴에서 부모에 대한 존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미국에 온지 5년 밖에 안 돼서 아직 영어실력이 딸리지만 자기는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외과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들을 많이 대하지만 칼로스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너는 꼭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말뿐이 아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유감스럽게도 칼로스 같은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 중에는 칼로스처럼 스스로 공부하려는 학생들보다는 부모의 열성이나 강압 때문에 하는 학생들이 더 많다.
부모의 열성 때문이든,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든 이런 학생들은 일단 올바른 궤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학교 때 공부 잘한다고 사회에 나가서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석은 으레 달아야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의욕도 없고, 부모의 압력도 통하지 않아서, 공부를 포기하고, 그렇다고 뚜렷한 계획도 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이다. 자칫 사회에 위협이 되거나 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최선의 교사는 부모라는 데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친부모를 갖춘 전통적 가정에서 살고 있지 않다. 또 올바른 궤도를 이탈한 아이들을 손잡고 이끌어서 장래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밀어주는 사람이 반드시 생부모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모든 학생들, 특히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의 잠재적 에너지를 생산적이고 친사회적인 채널로 인도할 수 있는 창의적인 교육제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어차피 모든 학생들이 다 칼로스 같을 수는 없으므로 방황하는 탈락자들을 끌어안아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 교육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김 순 진 <밴나이스 고교 카운슬러·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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