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칼럼/건국 대통령 이승만박사(상)

2006-07-18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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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모목사(이승만박사 뉴욕기념사업회 회장)

1960년 4.19 혁명으로 불행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였다.그의 허심탄회한 정치이념에도 불구하고 악덕 위정자들의 부패와 인의장막으로 인하여 대통령의 판단력이 혼미해져 일어난 3.15부정선거는 민주역사에 오점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58주년을 맞이하여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를 재평가함으로서 초기 건국 역사관을 바르게 펼치고자 한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링컨 대통령들도 정치적 과오가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그들을 전설적인 지도자로 추앙하고 그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역사의 영웅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민족은 참 지도자와 영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고 우남 이승만박사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한민국 현대사에 살아있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같이 고 이승만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역사와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대한민국의 국부다.


94년 전, 1904년 이승만박사는 고종의 밀서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해방될 때까지 미국에서 33년 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역사적 인물이다. 서거 41주년(1965.7.19)을 맞이하여 고인을 먼저 추모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역사에 그가 남긴 불멸의 공적을 재평가하고자 한다. 그는 고종 12년,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1875년 3월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부친 이경선과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아명은 승용이다.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6대 독자였다. 그는 가난하고 낙후된 조선봉건사회를 현대사로 개혁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 일본, 청국, 미국 등 4대 강대국의 정치적 압박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20살 때 신긍우씨의 권고로 1894년 4월2일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1885설립)에서 신학문을 통하여 서양 과학문명의 세계를 알게 되며 아펜셀러선교사와 배재학당 교사 탁사 최병헌목사(정동교회목사 1858-1927)로부터 기독교의 만인 구원론의 예수신앙을 접하고 그는 일찍이 기독교신앙에 입문한다. 후에 정동감리교회 장로가 되었다. 그는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체되고 지도자들이 투옥될 때 투옥(1899.1.9)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민영환의 감형주선으로 6년만에 석방되었다(1904.8.9).

그는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썼다. 이 책은 당시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으며, 위정자들을 질타하고 국민의식을 고취함으로서 민주독립 개혁을 촉구하였다. 나아가 본서는 왕국 봉건사회로부터 민주평등사회로 개혁하는 한국 근대화의 정신사의 지침으로서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석방직후 고종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하는 이승만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였다(1905.1.15). 국무장관 죤 헤이와 딘스모어 하원의원과 면담하였고 미국 T.D.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일본의 한반도 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1958.8.4).

1906년 아들 봉수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병사했다. 애절한 슬픔 속에서도 그는 신학문 탐구에 혼혈을 기울여 미국체제의 황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지 워싱턴대학교,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았다. 그는 명문대학에서 국제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서 국제적 정치인물로 등장하여 일제침략으로 짓밟힌 백의민족에게는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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