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의 소리’40년 은퇴하는 한인섭 국장

2006-03-29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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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알린다. 그것이 우리에 유리하든, 불리하든. 지난 40년, 난 VOA의 이 원칙을 좇고자 했습니다.”
엊그제까지 북한 리근 외무성 국장과 무릎을 맞대고 마이크를 잡았던 칠순의 영원한 기자가 은퇴한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 한인섭 국장(70)이다.
4월1일 현역에서 물러나는 그는 한때는 세계의 창이었고 지금은 자유의 종이고자 하는 VOA에서 한국어 방송의 상징적 존재였다.
1971년 한국에서 미 VOA로 전근된 이후 그의 35년 존재는 워싱턴 D.C. 인디펜던스 애비뉴 330번지 내의 흔들림없는 마이크 앞에 있었다. 어찌보면 VOA는 그란 존재의 애칭이자 삶의 전부였다.


■베트남전 특파원으로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 국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공군 복무를 마치고 1965년 기자란 숙명적 생애의 첫 발자국을 뗐다. 주한 미 대사관 공보원에서 방송 담당관으로 일한 그는 베트남전이 격화되자 미국의 소리 월남 특파원으로 한국군의 전황을 취재, 보도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한국의 언론인들이 울분하고 때론 통정할 때 ‘멀리 있던’ 그는 행운의 기자였다.
69년 닉슨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때는 미드웨이 섬에서 열린 미-월남 정상회담 취재차 백악관 전용기를 타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한국 기자들이 외국 출장가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KBS와 공동으로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취재하면서 전국의 시골을 돌아다닌 기억도 이 젊은 기자에는 청춘의 훈장같은 것이었다.
1971년, 워싱턴의 VOA 본부로 발령나면서 그의 생은 2막을 열어젖힌다.
미국에서 그의 취재 영역은 의회에서의 한국 관련 청문회와 70년대 남북의 외교 전장이었던 UN이었다.
냉전의 살얼음은 이 유엔에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남겼다.
“한번은 북한측서 기자회견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한국 기자는 사절이고 외신기자들만 참석하던 시절이었지요. 내가 나타나자 놀라며 쑥덕쑥덕하더군요. 남조선 기자가 왜 왔느냐는 거였지요. 소속이 어디냐고 묻더니만 미국의 소리라니까 됐다며 허락하더군요.”


■유신으로 방송 중단
60-70년대만 해도 VOA는 세계의 창이었다. 오직 전화와 텔렉스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당시에 단파 라디오를 통해 전해 듣던 미국의 소리는 오늘날 CNN 이상이었다.
1942년 한국으로 첫 전파를 탄 VOA는 해방 후 70년대초까지 한국의 모든 라디오 방송들이 매일 아침 AM으로 중계했다. 그러다 유신으로 방송이 막히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로 CBS 방송 중계마저 중단됐다.
언론 통제로 세계와 벽을 쌓았던 유신 치하의 한국에서 VOA는 자유의 목소리와 다름없었다.
AM대신 단파로 미국의 소리가 쏘아댄 전파는 4.19와 5월 군사 쿠데타, 유신과 김대중 납치사건, 80년 신군부 집권, 광주민주화운동 등 현대사의 고비마다 태평양을 건넸다.
당대의 현실은 그와 정면으로 부닥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외면하지도 않았다.
“1980년대까지 VOA는 한반도 전체를 겨냥했습니다. 유신정권 하와 80년대는 남한 주민의 알권리가 주 대상이었고 한국이 발전한 90년대부터는 북한으로 바뀌었습니다.”
1985년 그는 한국인 처음으로 국장에 부임했다. VOA 한국어 방송은 이제 그의 신념 아래 놓여 있었다.
늘 그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한 건 VOA가 미국의 선전기관 아니냐는 끝없는 질문이었다. 오해는 잘 씻겨지지 않았다.
“제가 국장을 맡은 이래 제가 책임지고 방송했지 누가 기사에 대해 간섭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외부의 오해가 억울합니다.”
그는 1976년 제정된 VOA의 원칙을 상기시켰다. 그것은 첫째 객관적이고 정확한 뉴스, 둘째 미국을 있는 그대로 알린다, 셋째 미 정책을 알린다는 것이다. 오해는 이 세 번째 원칙으로부터 종종 왔다. 하지만 VOA는 정책 보도에 대해서는 “다음은 미 정책을 반영하는 논평입니다”란 전제를 달고 뉴스와 정책 홍보를 분리시켰다.



■부시도 비판한다
뉴스의 객관성을 위해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은 물론 이라크전으로 인해 부시 대통령에 쏟아지는 비판과 지지율 하락도 그대로 내보냈다.
90년대 초반 한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김일성 사망설은 그의 보도관을 알려주는 한 예다.
“일본의 한 통신사 보도로 촉발된 이 뉴스의 소스에 대해 확신하지 않았기에 우린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허위보도로 판정됐지만... 우린 설사 늦더라도 정확한 보도를 하려했고 그래서 VOA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의 증언은 한국 언론이 당면하고 위협받는 객관성에 대한 주문처럼 들린다.
북한에 대한 보도도 이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북한 정권 교체, 우린 이런 것은 생각 안합니다. 그저 북한 주민에 알 권리를 주고싶을 뿐입니다. 우리에 미국도, 한국도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북한도 우리를 적대적으로 보지 않는 것같습니다.”
1992년 그가 방북했을 때 김영남 당시 외무상은 “당신들 보도 잘 듣고 있다”며 불편부당한 VOA의 언론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해주었다 한다.


■여행과 집필 계획
현재 VOA는 아침 8-10시, 오후 3-4시 하루 3시간 방송한다.
그에겐 이 세 시간이 너무 짧다. 2004년 북한 인권법의 통과로 현재의 방송시간이 6시간으로 늘어나게 돼 있으나 예산문제 등으로 시행이 안되고 있어 그를 안타깝게 한다.
한 국장은 “시간이 늘어나면 북한의 엘리트층과 소외층 모두에 어울릴 수 있는 융통성 있는 방송이 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오랜 방송 기자 생활을 마감하는 은퇴 후 그가 준비할 제3막은 아직 불확실하다.
바깥에서 들여다본 한국 40년을 정리하는 책을 써보란 권유도 받고 대북한 방송에 대한 요청도 받지만 그는 우선은 머리를 비어두고 싶어한다.
“무엇보다 쉬었으면 합니다. 아내와 여행도 하고 선교 여행도 떠나고...”
지난 40년 그의 직업적 삶은 무겁지 않았다. 냉정과 열정의 사이에서 그는 자신과 세상의 중심을 잡으려 했고 유머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시종 그는 그대로 였고 앞으로도 여전히 현역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같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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