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 어머니의 보름달

2006-01-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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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시인 이성부의 시를 꺼내 읽는다. 그의 시어 속에는 늘 목마름을 추겨주는 대목이 들어 있어 맘에 든다.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 산길 풀잎마다/옛적 어머니 웃음 빛 담은 것들 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꾸중듣고 고개만 숙이시더니/ 부엌 한구석 뒷모습/흐느껴 눈물만 감추시더니/ 오늘은 돌아가신 지 삼십여 년만에 뵙는 어머니 웃음 빛/이리 환하게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어머니를 그려내는데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뼈저린 그리움을 시인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만난 들꽃 화단을 통해 한 폭의 수채화로 그려내고 있다.
시제는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다.
시 초입에 나오는 `여시비`는 여우비의 전라도 사투리로, 사전을 찾은 즉 `맑은 날에 잠깐 뿌리는 비`로 나타나 있다. 시인의 고향이 전라남도 어디 라더라. 그래서 시인은 표준어 대신 여시비라는 전라도 사투리를 급히 차용한 듯 싶은데, 이 사투리 하나로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화들짝 증폭되니 놀랍다.
운율도 가경이다. 구절 구절마다 `∼니`로 이어지는 반복 리듬이 좋다.
(여시비가) 내리니, (고개만) 숙이시더니, (눈물만) 감추시더니… 끝 절 역시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이 시에서 내가 읽는 또 하나의 의미 심장한 대목은 시인이라는 직업이 지니는 전업성(專業性)이다. 한국 문단에서 시만 써서 밥을 벌 수 있는 시인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시인들은 대개가 풍류 시인들이다. 시인에게 시는 멋이나 부업일 뿐이다. 예외가 이성부다. 그는 대표적인 전업시인으로, 하루 종일 시만 생각한다.
한때 나와 같이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예 기자 직을 버리고 하루종일 시작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의 삶 자체가 시라는 생각이 든다. 여시비 맞은 풀꽃만 봐도 어머니의 환한 웃음을 연상하듯 그는 60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하루 종일 어머니만을 생각한다. 시만을 생각한다. 그가 가난해서 더 좋다.
여기서 `가난`은 내게 일약 빼어난 시어로 바뀐다. 이성부의 `여시비…` 시 전체에 알게 모르게 깔려 있는 이 가난은 어른들이 툭하면 자식이나 손자에게 근검을 가르치기 위해 떠는 청승과는 구별된다.
“…어린 꼬마가 동네 구멍 가게에 들려 인형 하나를 산다. 가게 주인 할아버지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가, 어떡하지? 거스름돈이 없는데…`라며 난처해한다.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던 꼬마는 제 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꺼내더니 주인 할아버지에게 또 한번 준다. `자, 여기 있어요` ”
제가 준 돈으로 거스름을 치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주제는 가난이다. 독일 문필가 막스 뮐러의 자전적 소설 ‘독일인의 사랑’(Deutche Liebe)에 나오는 뮐러 자신의 유년 시절 회상이다. 가난은 이토록 아름답다.
그러나 이성부의 시에서 정작 내가 만나는 것은 이 시의 주제인 어머니다. 할머니 앞에서 노상 고개만 숙이시던 어머니, 부엌 한켠에 숨어 눈물만 훔치시던 어머니를 나는 본적도 없고 그런 할머니가 계시지도 않았다. 허나 이 대목을 읽을라치면 나도 몰래 이성부가 되니 이상하다.
울었던 건 어머니가 아니고 오히려 나다. 지금처럼 정초 무렵이다. 내가 자라던 지방도시에서는 매년 이 맘 때면 초등학교 대항 합창대회가 열렸다. 방학 내내 연습을 한 후 시합당일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합장소로 떠나던 날 나만은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가난으로 시합용 유니폼을 장만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빈 운동장에 홀로 남아 엉엉 울던 대목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맨다. 어머니 맘 상하실 까 싶어 유니폼 말을 차마 못 꺼낸 것이다.
이성부의 시를 덮는다. 그리고 새삼 따뜻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제 그 어머니를 나는 오는 정월 보름이면 전라도 용담으로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곳에는 어머니를 빼다 박은 막내 이모가 살고 계신다. 달도 볼 것이다. 대학시절 이발만 하고 와도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우리 새끼, 보름달처럼 생겼네!”라던 그 어머니의 보름달을.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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