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로 스며드는 한류
2006-01-05 (목)
지난 연말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크리스마스 카드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포근한 설경 속으로 꿈꾸듯 미끄러져 들어갔다. 백여채의 집 앞마당 가에 나란히 줄지어 선 수천 개의 하얀 종이 샌드위치 백이 눈발 속에 촛불을 밝히는 장관은 이 동네의 연중행사였다. 그 날을 맞아 많은 집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서성이는 장면도 창 밖에선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런 집의 하나인 수잔의 집을 찾아 벨을 눌렀다.
이 방, 저 방에 흩어져 있는 40여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다과와 와인 잔을 들고 합창이 흘러나오는 리빙 룸으로 갔다. 나비 넥타이를 한 검은 정장의 피아노 맨이 빨간 산타클로스 모자를 쓰고 신나게 노래 부르며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거구를 흔들어대며 땀을 뻘뻘 흘리던 그는 그 날 저녁 4시간 동안 악보도 없이 크리스마스 신청곡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어 직업 피아노 맨으로서의 실력을 과시했다. 그의 피아노 솜씨를 흡족하게 즐긴 손님들은, 당신이 어느 누구보다 더 즐긴 것 같으니 수잔에게 오히려 감사비를 내야겠다며 농담을 했다.
한 노부부와 첫 대면을 하며 한국인이라 했더니, 노래 부르기를 아예 포기하고 나를 코너에 몰아 넣고(?) 얘기를 꺼냈다. 군인인 아들이 지금 가족과 함께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이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자신들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을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우리 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그들에게 ‘고요한 밤‘을 우리말로 노래해 주었다. 생소한 한국말 가사에 모든 사람이 대화를 멈췄고, 반주하던 피아노 맨은 신기한 표정의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과 문화에 대해 물어왔지만 파티는 이미 끝날 시간이 되고 말았다. 동네를 빠져 나올 땐 다시, 황홀한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 밖으로 떠밀려 나오는 것만 같아 영 아쉬웠다.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내게 몰렸던 사람들에게 못 다한 말을 생각하니 더더욱 서운했다.
그 며칠 후 한 모임에서 회의를 마친 다음 ‘팟틀럭’식 점심을 먹었다. 나는 김밥을 가져갔는데, 이를 미리 안 사람들이 많이 갖고 오라고 성화를 해서 커다란 접시에 2층으로 쌓아 가지고 갔다.
김밥을 보자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외쳤다.
“아, 스시까지 먹게 되었으니 우리도 드디어 지적인 팟틀럭을 하게 되었네!”
대다수가 자타 공인하는 상류층 사람들이고 상의 음식도 고급 음식들뿐이었는데, 소풍식 김밥을 보고 그런 말을 하니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옆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한 번에 두세 개씩만 집어가면서 김밥 접시 앞을 몇 번씩 오갔다. 결국 그 접시가 제일 먼저 바닥을 드러냈다. 그 날 받은 찬사만으로도 황송했는데, 후에 점심 준비위원이었던 제닌은 특별 땡큐 카드까지 보내주었다.
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둔 날엔, 낸시의 파티에 갔다. 낸시의 미국인 친구가 김밥을 두 접시나 만들어 왔다. 색과 모양이 내 것보다 훨씬 예뻤다. 반가운 김에 튜나 김밥을 제일 먼저 입에 넣었는데, 밥이 너무 질어 물컹 씹혔다. 난 뱉을 수가 없어 억지로 삼킨 다음 다신 그 김밥에 손대지 않았건만, 미국인 친구들은 맛있다면서 먹고 또 먹었다. 그 파티에서도 김밥 접시가 제일 먼저 비워졌다.
지난 연말엔 미국 친구들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어느 해보다도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국말로 노래하면서 한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할 기회도 있었고, 김밥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
동양인이 적고 보수성향이 짙은 이곳 중서부에도 미국인들의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어 반갑다. 그들의 올바른 이해를 도와 줄 우리의 책임도 점점 무거워진다.
내년 크리스마스 파티에선 어떤 동양문화를 대하게 될지 기대된다. 김치라도 먹게 되는 건 아닐까.
김보경
북 켄터키 주립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