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애틀에 사는 재미

2005-12-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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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은 물 속에 풍덩 빠진 도시다. 도시 서쪽에는 퓨젯 사운드 바다가 넘실대고 길게 늘어선 도시 동쪽에는 덩치 큰 워싱턴 호수가 포근히 감싸고 있다. 어디를 가도 늘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에워싸고 철 따라 풍요로운 산물들을 토해 놓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1년 용돈을 마련해 주는 탐스러운 고사리는 전 미국은 물론 한국에까지 이름이 나있다. 늦가을에 돋아나는 신비하게 하얗고 탐스런 송이버섯은 여름내 처지고 나른해진 우리의 입맛을 한껏 돋구어준다.
사철 바닷가 어디에서나 흔하게 잡히는 꽂게는 이곳이 본산지이다. 서북쪽에 위치한 던지니스 해안지방 이름을 따서 던지니스 꽂게라 부른다.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어른 팔뚝만한 구이덕이라는 조개는 이곳 퓨젯 사운드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대형 조개이다. 일본사람들이 미루과이라고 부르며 많은 량을 수입해 간다.
한국 사람들이 썩어도 준치라 하며 좋아하는 준치는 5월말 경에서부터 6월말쯤이면 긴긴 태평양 유랑생활을 마치고 산란하기 위하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온다. 귀향하는 고기들을 위하여 어김없이 댐마다 고기사다리를 놓고 이들이 용이하게 거슬러 올라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연어의 종류대로 그리고 준치까지 하루에 몇 마리가 댐을 거슬러 올라갔는지 확인하여 친절하게 일간신문에 발표해 놓는다.
신문에 발표 된 숫자가 풍성해질 무렵 태공들은 낚싯대를 둘러메고 댐 하구로 모여든다. 준치는 미국사람들이 먹지 않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제한도 없다. 유능한 태공들은 하루에 백여 마리 이상을 잡아낸다.
추워진 날씨가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 저녁이 되면 태공들을 따뜻한 소파에 앉아 있게 그냥 놔두지를 못하는 것이 꼴뚜기들이다. 지난 주말 친구들과 꼴뚜기 낚시를 갔었다. 밤 10시에 집합장소에서 집결하여 간식으로 먹을 라면과 곤로까지 준비하여 떠났다. 40여분을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하니 미리 온 몇 명의 낚시꾼들이 열심히 잡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드디어 느낌이 왔다. 열심히 당겼더니 하얀 꼴뚜기가 먹물로 주위를 시커멓게 물들이며 올라온다. 한 뼘 정도 되는 놈이다. 몇마리 잡고 나서 얼마동안 헛손질만 하다가 새벽 3시가 넘으니 드디어 하얗게 꼴뚜기 떼가 몰려왔다. 여기저기서 손놀림들이 빨라진다.
어떤 친구는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잡히는 것을 보니 많기는 많은가 보다고 한다. 얼마를 잡았을까 다시 손놀림들이 둔해 질 무렵 시계는 네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섯 명이 잡은 것이 5갤런 통을 거의 채우고 있다. 그사이 추위는 어디에 갔었는지 이제야 오슬오슬 한기가 스며든다. 이제는 라면이고 뭐고 다 싫다. 서둘러서 집으로 향한다.
부지런히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손질 한 후 잘게 썰어서 달콤새콤한 초장에 푹 찍어서 넣으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 속에서 살살 녹아든다. 아! 이 맛을 무엇에 비기겠는가? 그 동안의 추위가 훈풍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몇 해 전에 LA에서 귀한손님들이 오셨을 때 시애틀 야경을 보여드리고 부두에서 낚시꾼들에게 사정하여 한 봉지 사다가 잘 손질하여 대접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맛을 못 잊겠노라고 하신다.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떨고 있는 겨울밤 그 맛을 떠올리면 입안 가득히 울려 퍼지던 향취.
이런 저런 것들이 20여년이나 아름다운 시애틀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김홍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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