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성탄절의 감격

2005-12-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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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탄생은 고난에 처한 인생들에게 희망과 평화였다. 어둠이 깨지고 빛의 영광이 솟아올랐다. 당시의 권력층과 상류사회는 기득권을 빼앗길까 초조하고 긴장했다. 로마의 식민지에 억압되어 사는 민중의 유일한 소망인 독립과 자유, 인권 투쟁의식은 절정으로 올라갔다.
현대문명의 절정인 이 순간에도 민족간, 국가간이나 개인간 분쟁이 폭력의 힘으로 해결되는 것은 인류문명의 후퇴이다. 이라크 전쟁은 대국의 무력도발이며 약소국을 점령하는 식민지 사관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전쟁은 인권유린의 극치이다. 미국은 더 이상 인권을 논할 자격을 상실했다. 이제라도 극단논리를 배격하고 온건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70년대 한국도 인권유린이 세계 최상위로 오른 슬픈 역사가 있다. 경제개발을 빌미로 노동인권은 유린되었고 임금 착취를 개발도상이란 특수상황으로 합리화했다. 군정의 무능은 자기 민족의 인권을 부정하고서 영구집권이란 음모를 꾸미고 파쇼 체제를 강화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공부 목적으로 모인 활동그룹을 겨냥해서 자기네 정권 연장의 술책에 이용하고 희생시켰다. 인민혁명 전선으로 명칭을 붙이고 북과의 연결을 억지로 조작하고 과격단체라는 이미지를 부추겼다. 인혁당 간부 8명은 1975년 4월7일 13명의 재판관에 의해 정치재판을 받았다. 사형선고를 받고 상고도 못해보고 8시간만에 형장으로 끌려나가 사형을 당했다. 죄목을 요란하게 갖다 붙였다. 허위조작이었다. 사형 언도를 내리기까지 불과 30분만의 졸속 재판이었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 30년만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공개했다. 그간 독재정부는 공개를 꺼려왔다. 당시 정치재판은 공포분위기였고 항쟁한 사람 가운데는 미국인 신부 시노트가 앞장섰다. 그는 인천에서 올라와 데모하다가 구속되었다. 한국 정부는 시노트를 추방했고 국내의 민주인사를 전원 연행해 갔다.
1975년 가을 미국에 온 시노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시노트는 미주의 민주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시노트는 인혁당 유가족들의 편지를 내놓았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 자세히 읽었다. 내용은 유가족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노동, 품팔이조차 구할 수 없어 막막하다는 것과 애들은 학교에서 내쫓겨 갈 데도 없고 동네사람들로부터는 완전히 외면 당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것으로 나를 슬프게 했다.
시노트 신부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종교단체, 대학마다 강연하고 많은 동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전국 방송에도 출연하여 인권문제의 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불우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다. 강연료와 천주교의 성금을 합해 일금 1만달러를 인혁당 유가족에게 전달했다.
인권천부설을 믿는 우리 민족은 부정한 권력이나 정부에 대항했던 의로운 역사가 있다. 당시 많은 한인 교회는 낮고 천한 사람들, 소외된 내 민족과 감옥에 수감된 민주인사, 양심수에는 냉담했고 권력에 맹종한 수치스러운 역사가 있다.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인혁당 사형수의 유가족도 우리의 형제요 자매다. 나와 상이한 계층이나 생각에도 문 열어야 한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구유에 누우셨던 뜻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성탄 계절이어야 한다.


고세곤
평화향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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