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변호사의 질문

2005-12-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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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렇습니다

“아프리카에 와서 보라”(Come and See Africa)라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친지들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느냐고 물을 때 나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 한다.
선교지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자주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성경 속의 예화는 문화와 시공간의 차이를 좁힐 수 있기에 나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한다. 너무도 익숙한 예화를 읽다가 가끔 새로운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5년 전, 첫 번째 르완다 단기선교를 준비하면서이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자기 이웃을 낫으로 찍어 죽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까?”등 의문이 저절로 생겼다. 설교 주제로 좋은 사마리아인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르완다에서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증오하여 100일 동안 거의 100만이라는 상상도 못할 숫자의 사람들이 살해되었기에, 좋은 사마리아인이라는 교훈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르완다 사람들을 직접 만났을 때 그들의 친절함에 그들의 사랑에 나는 놀랐다. 르완다 사람들은 이웃들에게 참으로 다정하고 친절하다. 길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껴안고 반가워하면서 인사를 나눈다. 외부에서 온 나 같은 사람이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무엇을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보다 그들은 사랑을 훨씬 더 잘하였다.
하지만 나는 해마다 그 곳에 가면 선한 사마리아인 대하여 가르쳤다. 이번 방문 때, 나는 그 이야기 속의 숨은 힘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기 전에 율법사, 즉 요즘으로 하면 변호사가 묻는 말에서 나는 그 진실을 발견하였다.
어떤 변호사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으로 응답하셨다.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그 변호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기록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네 말이 맞다” 하고 말하셨다.
이 유대인 변호사처럼 우리들은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 그 대답은 ‘사랑’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항상 그럴 것이다. 르완다 사람들도 답을 알고 있다. 변호사의 다음 질문에 주의하여 보라. 그의 질문이 사랑을 정의하거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 변호사는 사랑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
그의 질문은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이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여 주시며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신다. “매맞고 강도 당한 그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 하고 물으셨다. 변호사의 답은 역시 또 맞는 답이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고 우리가 묻는다면, 우리는 틀린 질문을 하고 있다. 옳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이다.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어떠한 이웃입니까?”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라는 정답을 배워서 잘 알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포인트는 사랑을 더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서클을 더 넓히는 것이다.
르완다 사람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사랑, 친한 친구 사이 사랑을 우리는 안다. 단지 우리들이 그와 같은 사랑을 실행하기 힘든 것은 변호사의 그 질문에 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부모 친척 친지 동족들이 나의 이웃인가. 이웃집 청소부인 멕시코 여자인가. 일본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의 이웃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 변호사가 하는 질문을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반응에서 옳은 답을 찾을 수 있다.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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