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운동권답게 산다는 것

2005-12-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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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마지막 주말 단풍이 채 지지 않은 뉴잉글랜드의 한 휴양관에서 13명의 남편 대학 동기생들이 모여 동창회를 가졌다. 애당초 계획되었던 오락 프로그램들은 전혀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지난 30여년간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2박3일의 시간은 턱없이 모자라는 듯했다.
60년대와 70년대 학부와 대학원 학생으로 미국 대학 캠퍼스에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그들의 과거사를 훔쳐보는 의미 외에도 미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생생히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한결같이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과 베트남 전쟁을 떠올렸다. 모두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또렷이 기억을 했고 그 충격을 이야기했다.
베트남 전쟁이 길어지면서 대학원생들도 징병 대상에 포함, 추첨에 의해 불려나갔으며 이들은 만약 내 차례가 오면 가야 하느냐, 아니라면 캐나다로 도망을 가거나 양심적 반전파로 판정을 받는 절차를 밟나 등등 수없이 바뀌는 생각으로 편치 않았었다 한다. 눈이 나빠서라거나 운이 좋아서, 아니면 양심적 반전파로 인정받아서, 해군에 자원 입대해 국내 근무를 해서 등등의 이유로 결국 12명은 참전을 피했고, ROTC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했던 한 친구만 베트남엘 갔었지만 모두에게 베트남은 아주 직접적인 뼈아픈 기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모로코 정부 경제고문이었던 앨은 텍사스대 교수 시절 동부 출신인 자기 부부가 텍사스 지방의 카우보이 문화에 동화가 되지 않아 재미없어 하던 중 동부의 한 친구가 전화해 아프리카 지역 경제고문단을 구성하는데 끼지 않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 2년 바람이나 쏘이고 올 심산으로 살던 집을 세주고 짐은 적당히 꾸려 빌린 창고에 집어넣고 훌쩍 떠났는데 결국 17년이나 아프리카에 머물었다.
팻은 3년 사이에 2개의 다른 보험회사 간부직에서 해고되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컨설팅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과연 어떻게 ‘9 - 5’ 직장을 다녔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의 성격상 자진해서 개인 사무실을 차리지는 결코 못했을 터인데, 그야말로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예일대 신학대 교수인 해리는 몇년전 학과장을 맡기로 하여 이사회의 승인을 받았는데 마침 그 시점에서 학장이 갑자기 사임을 하는 바람에 이미 이사회 ‘심사를 거친 당신이 학장직을 하라’고 해서 전혀 생각지도 않던 학장이 되었다고 했다.
보스턴 칼리지(BC)가 보스턴의 가톨릭들이 다니는 동네대학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 명성을 쌓기 위해 동북부와 중서부를 돌며 모집해온 장학생들인 이들은 대부분이 자신 집안 최초의 4년제 대학 졸업생들이었다 한다. 그들을 스카우트해 온 학교측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산물이 있었는데 개성이 강하고 자기 생각이 확실한 이들 그룹이 조용하던 캠퍼스에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의 물결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운동권이었던 셈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우연이 실어다준 삶이 이들을 어디에 데려다 놓았던, 매순간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감을 잃지 않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들 이야기에 소록소록 배어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배우자들 또한 직장을 가졌거나 말거나 자신의 지역사회에 깊이 참여해 오고 있었다. 나는 소위 한국의 운동권 출신들 가운데 이들처럼 평생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잃지 않고 지켜 가는 사람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은 2년 후 다시 만나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지 토론을 벌이기로 했다. 봉사를 하며 산다는 생각은 모두들 확실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 얘기해 보자는 것이다. 이들을 지켜보며 이 나라 사회운동 뿌리의 깊이가 새삼스레 느껴져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유경
홀 와이드 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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