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올 연말 모두 푼수가 됩시다

2005-12-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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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사이에 지금껏 구전돼 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절친한 친구 둘이서 여행을 하다 천사를 만난다. 천사 왈 “너희 둘한테 소원 하나씩을 들어주겠다. 단, 나중 사람에게는 먼저 말한 사람보다 두 배로 소원이 이뤄지리라”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우정은 간데 없고 누가 먼저 소원을 말할 것인가를 놓고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급기야는 성질 급한 친구가 상대의 멱살을 쥐고 “너 먼저 말못해? 이 간특한 놈!”이라며 길바닥에 내 동댕이친다. 땅바닥에 엎어진 친구, 속죄하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제 눈 하나를 멀게 해 주세요!”
결과는 자명했고 무서웠다. 첫 친구는 외눈박이가 되고 멱살 쥔 친구는 두 눈이 멀었다.
섬뜩한 우화다. 새삼 친구들 하나 하나가 무서워진다. 다른 친구는 제쳐두고, 우선 지난 한 주 동안 나와 만나 시시덕대고 교신했던 친구들 하나 하나를 점검해 보는 건 그래서다. 우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동창이 보낸 E메일부터 소개한다. E메일 속에는 녀석이 자필로 그린 웬 여인의 초상화도 함께 들어 있다.
“말코 승웅에게. 얼마전 심혈을 기울여 여자 초상화를 하나 그려 아는 사람들에게 보냈더니 그 여인을 잘 알아야 할 우리 큰형수한테서 이런 답장이 왔다. `내가 아는 사람이유?`. 아니, 이럴 수가… 열을 받아 요번에는 알아 볼 수 있게 그려 네놈한테도 보내니 누군지 알아 맞춰 봐라 “
나 역시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네 놈 각시 맞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예쁘구나. … ‘빨강 양말’ 홍 싸대기는 지난 보선에 떨어져 풀이 죽어있고, 올 망년회 회식은 신 대포가 부담키로 했다. 신 대포는 우리보다 1년 위면서도 지네 동기보다 우리와 더 친한지라 우리 기수로 명예 가입됐다. 웃기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부터의 답신.
“말코야, 답장 고맙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들 잘 들 있으려니. 느네 서울 놈들 술 담배 제발 고만 들 해라…”.
이틀 후에는 LA에 사는 동창한테서도 E 메일이 왔다. 샌프란시스코로부터 기별이 갔던 모양이다.
“말코 읽으라.… 한국일보의 네 칼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읽고 있는데, 네 놈 술만 마시면 돈키호테가 되더니 언제부터 글이 그토록 논리적이 됐냐…웃긴다. 오래 살다보니 별 꼴 다 보는구나. 히히…”
‘빨강 양말’ 홍 싸대기는 경북 영주 세탁소집 출신 자칭 천재 홍 사덕을 말한다. 대학시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 교정 벤치에 앉아 있다 예쁜 여학생이 지나가면 제 바지 끝을 살짝 걷어올리기 일쑤였다. 그날 신고 온 빨간 양말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1년위 신 대포는 최근 민주당으로 옮긴 신중식 의원의 별명이다. 대학 때부터 엉뚱해 어느 날 영문학자 겸 시인 고(故) 송 욱 교수가 대학 구내를 산보하자 그 뒤를 따라 걷다 “시인 송 욱은 지금 뭘 사색하는가?”라고 일갈했다. 깜짝 놀란 교수가 시인 특유의 몸짓으로 서서히 몸을 돌려 쳐다보자 신 대포는 느닷없이 옆에 함께 걷던 동기의 어깨를 내려치더니 “고얀 놈. 감히 교수한테 농을 걸다니…” 하고는 그 길로 도망쳐 버렸다.
모든 덤터기는 어깨를 얻어맞은 친구가 둘러썼다. 알고 본즉 신 대포는 지난학기 타과 교수였던 고인의 강의를 신청했다 보기 좋게 E학점을 맞았던 것이다. 그 분풀이였다. 친구란 이처럼 모자라고 푼수래야 좋다. 샘 많고 앞서려는 천박한 엘리티즘은 질색이다,
앞서 유대인 우화로 다시 돌아간다. 이 우화에서 문제되는 건 마음 약한 친구의 속죄다. 말이 속죄지, 엄밀히는 속죄의 탈을 쓴 증오다. 그리고 보면,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로 바뀌는 지금의 서울 세태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일테면 한때 같은 한총련, 같은 전교조, 같은 386 출신이었지만 정치 입문 후 금배지를 달고 못 달고 에 따라, 또 같이 금배지를 달되 너는 여 나는 야로 나뉨에 따라 연출되는 지금의 정치 작태 그대로다. 서울은 지금 이런 세태를 살고 있다.
지금의 황우석 교수 사건도 마찬가지다. “줄기세포를 바꿔치기 당했다”는 황 교수나 만들지도 않은 줄기세포로 논문을 조작했다며 “책임 떠넘기려는 시나리오”라 비난하는 노성일 미즈메디 이사장. 둘이 당초 어떤 관계였던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가 서로를 두둔하던 사이 아니던가.
여기에 방송사도 한 몫을 한다. 취재 훈련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받지않은 PD가 취재현장에 등장해 차치고 포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 나라밖에 없다. 타 방송을 특종(?)으로 눌러 시청률을 두 배로 올리려는, 예의 비뚤어진 소원 탓이다.
이제 연말이 되면 친구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일 테고, 난 그 자리에서 대취할 꺼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듣건 말건 이렇게 외칠 테다. “니들 잘 알아둬… 우리 사이에 소원은 없는 법야! 알아 몰라? 이 푼수들아!”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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