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태권도가 주는 즐거움

2005-12-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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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어떤 모임에 갔다가 모르는 부부와 동석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와 앉게 된 것을 반기는 눈치로, 현재 판사인 딸이 고교시절에 태권도 유단자였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도 태권도와 한국을 좋아하게 되었다며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처음 만난 우린 옛친구를 만난 듯 모임이 끝날 때까지 많은 얘기 속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태권도는 1969년 한국 정부가 세계화를 목표로 전세계에 사범들을 보내기 시작한 이래 2000년 올림픽경기에서 정식종목으로 첫 경기를 선 보였다. 그 여파로 지금 미국에선 가라데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에겐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뜻밖의 시간에,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한인 관장에 의해 운영되는 태권도 학교의 전국태권도대회는 대형 체육관에서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에 경례를 올리면서 시작된다. 부동자세로 나란히 선 수백 혹은 수천 여명의 미국인 선수들은 물론 객석의 보호자들까지 태극기 앞에 선 한국인 관장의 개회사를 경청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새롭게 내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든다. 30~40년 이상 수련한 머리 희끗한 미국인 제자들이 그 관장들을 군주 모시듯 정중하게 대하는 것을 볼 때면, 내가 미국에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한인들은 도장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아 즐겁다. 후배는 물론 대선배들까지도 내게는 더 깍듯이 예의를 지켜준다. 수련시간엔 한국어 태권도 용어를 쓰는데, 내 발음은 무조건 ‘표준말’이 된다. 한국 문화와 음식 등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땐 내 답이 곧 ‘한국학 교과서’인양 받아들여지니 나도 모르게 으쓱해지고 만다.
한인이어서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 신나긴 해도 스스로 수련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에 비할까. 강한 눈빛을 발하면서 비오듯 땀을 뚝뚝 흘리며 수련에 심취한 사람들의 즐거움은 옆에서 볼 때 경건하기조차 하다.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엔 더더욱 신체적 수련보다도 정신적 수련을 통해 태권도의 깊은 맛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태권도는 인종,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강, 호신술, 정신수련의 일석삼조의 즐거움을 준다. 내 경우엔, 약질 여성이어서 가졌던 ‘힘’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리게도 해주었다. 내 힘에 한계가 있어도 이젠 무조건 포기하지 않고, 그 한계까지 만이라도 자신감을 갖고 힘을 쓰게 되었다.
어린이의 경우, 처음엔 제멋대로였는데 규율을 지키고 자제력을 키우며 타인을 존중하게 되더니 결국 자신감, 책임감, 협동심을 갖고 후배들을 훌륭하게 지도하는 경우를, 지난 10여년 동안 수도 없이 보아왔다. 밑돌던 학교 성적이 올라가 우등생까지 된 것을 자랑하는 학부모들도 많이 보았다.
그 나이에 하필이면 왜 과격한 태권도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렇다. 태권도는 과격한 무술의 하나다. 올림픽경기에서 봤듯 혈기왕성한 10~20대가 상대를 꺾을 목적의 스포츠로서만 수련, 이용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품새와 자기 수양 중심의 수련을 한다면 중년층이나 노년층이 안전하게 고도의 경지를 즐길 수 있는 무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노년의 관장들이 힘이 넘치는 후배들에게 아직도 경이로운 순간들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한 대회에서 70세쯤의 할머니 유단자의 품새를 본 적이 있다. 연세도 높고 여성 참가자라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는데 ‘타이치’를 하듯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저게 무슨 태권도야 노인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보던 어느 순간 숨이 탁 막혀왔다. 천천히 내지르는 주먹과 서서히 올라갔다가 뻗는 발 차기에서 무서운 ‘정(靜)적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온몸에서 광채가 나는 듯싶었다. 그 후론 그렇게 기가 넘치면서 아름다운 태권도 품새를 본 적이 없다.
나는 몸이 찌뿌드드하거나 마음이 편치 않아 꼼짝하고 싶지 않을 때 더더욱 내 몸을 질질 끌고 도장으로 향한다. 돌아올 땐 기가 재충전되어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글쎄, 그런 생각 저변에, 70이 되면 그 할머니의 품새를 재현하는 미래의 즐거움을 야무지게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보경
북캔터키 주립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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