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안타까운 이별

2005-12-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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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저물어 간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아쉬움과 섭섭함을 달래려고 만남을 자주 갖게 된다. 그런 자리에 가면 웃음을 머금고 찾아오는 존재가 있다. 그의 촉촉함이 감미롭게 녹아들어 위장에 넘치면 분위기는 고조된다.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되고 사랑도 정신없이 빠져들면 후유증이 온다고 한다. 그도 정도껏 마시고 절제할 수 있는 습관을 가져야만 그와의 관계가 행복하고 즐겁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한파가 몰고 온 추위로 꽁꽁 얼었던 연말이었다. 동창 모임부터 시작하여 골프 동호인 모임까지 그는 나를 끌고 다니며 혼미한 상태에서 곡예를 연출하였다. 그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미끄러운 빙판에서 넘어졌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악몽 같은 고비였기 때문이다. 그를 탓하기 전 내가 그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내 곁에 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연인이 되어 있다.
기쁠 때보다 외롭고 슬플 때 더 다정하게 다가와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해 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림자처럼 있다가 손만 내밀면 안겨오는 존재가 되어 있다.
서울에서 고생을 할 때의 일이다. 어려운 처지에 슬픔이 몰아쳐 올 때마다 그는 내 곁에서 위로하며 달래주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결별하여야 한다. 나를 위한 이별이다.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진찰을 하고 증상을 확인하면서 철저히 몸 관리를 하는 게 좋다는 충고를 했다. 금주를 하라는 것이다. 반평생을 함께 한 애인 같은 존재를 떠나 보내야 하는 비통함이 마음을 울린다. 안타깝고 더 그리워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픈 상처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이제는 만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곤 했다.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감동으로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보니 나의 절제 없는 행동으로 결국 이렇게 우리가 헤어지게 되었다. 그 독한 사랑을 온전함 몸으로 받을 수 있을까. 때로는 몇 가지를 섞어 폭탄을 쏘았다. 소위 폭탄주라고 했는데 그거 한 잔이면 하늘이 노랬었다. 그런 폭탄을 맞으면서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천운이라 생각해야 할까.
미국에 오니 더없이 세련된 그들을 보면서 친해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있다.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열심히 마음을 붙잡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포도 알들로 정성껏 숙성시켜 만든 와인이다.
이육사의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이란 시처럼 알알이 여문 포도로 빚은 와인 한 잔으로 그를 대신하려 한다. 건강에도 좋고 분위기도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아 한해를 보내는 12월에는 와인을 준비해 놓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을 생각이다. 물론 의사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안주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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