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겨울 이야기-추수동장(秋收冬藏)

2005-12-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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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 칼럼/석중 스님(불정사 주지)

겨울 이야기-추수동장(秋收冬藏)
석중 스님(불정사 주지)

황색의 부드러운 햇살을 쫓아 그럴듯한 가을을 찾아 나섰건만 그 어디에도 볼 수가 없고,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에 분주히 반기던 청설모들도 하나 둘씩 그 바지런한 자취를 감춰가는 것이 아마도 이제 겨울을 준비하는 가 보다.
곳간 그득한 양식을 곁에 두고, 도대체 그들은 겨울에 무슨 생각들을 하고 지내는 것일까?
가을이면 산사(山寺)는 겨울나기 준비에 서서히 바빠지기 시작한다.
음력 시월(十月)보름이면 동안거(冬安居) 결제(結制)가 시작된다. 그리고 후년 정월 보름에 해제(解制)를 하게 되는데,
결제는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으로, 절 집안의 중요한 수행기간이다.
아무튼 월정사(月精寺)의 가을이 깊이 익어갈 무렵, 나보다 두 살 위인 김 행자와 더불어 대관령 보현사(普賢寺)에, 동란(動亂)후 금강산에서 내려오신 노스님을 시봉하러 가게 되었다.
보현사는 신라 말 낭원(朗圓)국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由緖) 깊은 사찰이었지만 그 때는 그 노스님 한 분만이 계셨다.
원래 계행(戒行)이 청정하신 분이라 신도께서 그 때는 그래도 신기한 라면을 드렸더니 맛보시고는 닭고기 삶은 국물이라 하시며 물리치셨다.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된 것은 화장실이었다.
절집안의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하는데, 굳이 풀이하자면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근심을 푸는 곳‘!
얼마나 낭만적인 이름인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화장지가 없던 시절에 보통은 버리는 종이나 파지(破紙)를 모아서 쓴다.
노스님, 얼마나 깐깐하신지 해우소에 종이를 못 쓰게 하시는 것이었다.
“행자님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요~”
신문지를 잘라 화장지로 쓰려하자 김 행자가 말린다.
“그거 노스님이 아시면 큰일 나!”
“왜요?”
“글이 들어간 종이는 못 쓰게 하셔!”
“그럼 어떻게 한대유?”
“저기 있잖아, 풀잎이랑 나뭇잎이랑....”
그 뒤로부터 화장실을 갈 때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굽이굽이 대관령은 골짜기도 많다.
보현사 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서 한 20리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휘휘하여 심심하지가 않다. 구석구석 잡목이 우거진 곳엔, 머루랑 다래랑 지천에 널려있어, 혀 바닥이 쩍쩍 갈라지도록 신나게들 먹어댔다.
그렇게 맑고 현란한 어느 일요일 오후,
“행자님, 이리 와서 같이 사진 찍어유~!”
아까부터 하얀 옷깃에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고생들이 노스님 방을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는, 불현듯 집 생각으로 마음이 울적하였는데, 안내하던 김 행자가 소리친다.
울긋불긋 가을의 정취는 해맑은 소녀들의 가슴속에도 물들게 하려는 것일까?
적적(寂寂)하던 이 산중(山中)이 갑자기 요동을 치는 것 같다.
괜히 쑥스런 마음으로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촬영 후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행자님들, 우리 같이 노래해요!”
지금도 나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데, 그때야 오죽했으랴!
숫기가 없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소녀들의 노래 소리는 서수남·하청일씨의 ‘꽃집의 아가씨’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보현사 행자님은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시간(時間)은 설국(雪國)을 재촉하는가!
만설(滿雪)의 적막(寂寞)속에서 사진을 갖다 주겠다던 막연한 기다림은, 군인과 전투경찰들이 들이닥침으로서 깨지고 말았다.
그때까지 울진·삼척에 대규모로 공비(共匪)들이 침투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추수동장(秋收冬藏)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갈무리 한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시공(時空)의 제약(制約)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너무 바삐 돌아가는 현실이지만, 이번 겨울에는 한 번 쯤 내 마음을 갈무리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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