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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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거지

2005-12-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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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조용한 아침, 차가운 바람에 슬레이트 지붕이 들썩거린다. 거센 바람에 지붕이 또 날아 갈까봐 밤새 조바심으로 잠을 설쳤다. 연탄불이 꺼졌나보다. 방이 썰렁하다. 난 일어나 밥을 앉히고 동생들을 깨워서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지난밤 엄마가 다녀가신 후 반찬이 많아졌다. 엄마가 다녀가시는 다음날은 도시락 반찬이 달라진다.
지난 주말 도네이션을 받으러 다니다가 무척 어려웠던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달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수돗물을 가까운 곳에서 팔아도 우리는 물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산등성이 너머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곤 했다. 물지게를 지고 몇 번을 쉬며 집에 도착하면 물은 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난 것은 해마다 이맘때면 난 ‘구걸’을 하러 다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이곳 워싱턴의 ‘희망의 집’기금 모금을 위해 한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나, 식품점을 한바퀴 돈다. 많은 격려도 받지만 가끔은 거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추운 날씨에 몸은 움츠려 들지만 마음만은 평화롭고 즐겁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쓰일 기금을 모으기 위해 나는 먹고 살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귀찮게 한다.
“어휴, 벌써 일년이 지나가나 보네. 왕 거지가 온 거 보니”
어느 인심 좋은 아주머니의 말씀이다. 아주머니는 수표를 한 장 써서 건네주며 “항상 좋은 일하는 데 도와줘야지” 그러시며 등을 쓰다듬어 주신다.
어떨 때는 뜨거운 눈물이 핑 돌만큼 감격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목구멍이 아프면서 눈물이 날 때도 있다.
가끔 난 ‘구걸’하러 가면서 꽃을 들고 간다.
“그 꽃 팔아서 기금으로 쓰지 그래요”- 3년 전 어느 식당주인 아주머니의 가시 돋친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어주고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준다. 그래서 난 왕 거지가 되어 구걸하러 다니면서도 신이 난다.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에 돈 몇 푼 던져주고 생색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자신이 어려우면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다. 돈보다 귀한 건 마음이다
올해도 워싱턴 지인들로부터 보석 같은 귀한 마음을 많이 받았다. 그 마음을 소중하게 만지고 예쁜 색깔을 칠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과 나누고싶다. 오는 4일 열리는 ‘희망의 집’ 기금모금만찬을 준비하며 오늘도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어 신나게 휘파람을 불며 빗속을 헤매다 왔다.


실비아 패튼
한미여성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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