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산다는 것 죽는 다는 것

2005-12-02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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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건목사(뉴저지베데스다교회)

올해를 지나면서 지구 곳곳에서 불시에 닥친 재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던가.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런 놀람과 충격이 사라지고, 별일 없었듯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피해를 몸에 부딪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때를 또 얼마나 힘들게 지나고 있
을까? 며칠 전에는 어느 회장의 따님이 불행하게 생명을 마쳤다는 뉴스를 접한다.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전해지는 불행한 기사는 또 한 번 마음속 깊은 곳에 아픔을 전해 온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나 보낸 사람들, 보내고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것도 자식의 죽음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참 못난 아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무엇으로 그 죽음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에게 할 짓인가? 그러다가도 본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생각도 해본다. 떠나보낸 부모는 평생 마음 놓고 한 번 웃어볼 수 있을까? 차제에 자녀를 먼저 보낸(대부분은 불행한 사연으로 먼저 보낸다) 부모님들은 이런 기사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또 한 번 깊은 고통을 반추하지 않을까?


산다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죽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사람이 가진 우주관 또는 내세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종교학의 주장이다. 사람이 어떤 내세관을 갖는가? 그 여부와 내용에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내세관은 크게 순환론적 내세관과 직선적 내세관으로 구별된다. 순환론적 내세관이란 불교나 힌두교에서 보는 대로 윤회사상을 말한다. 무릇 생물은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궁극적인 해탈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순환론적 내세관은 이 세상에서 잘못 살지라도 저 세상에서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낙관론이 깔려 있다. 수 만 번의 윤회를 반복하면서 언젠가는 깨달음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런 내세관을 가진 민족과 종교는 상
대적으로 시간이나 역사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역사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반면, 삶에 대한 탐욕과 애착에서 비교적 자유하다는 후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 기독교처럼 직선적 세계관은 창조에서 종말로 끝이 나며, 모든 생명은 단 한번뿐인 삶을 산다고 가르친다. 죽음 뒤에는 이 세상에서 살아온 행적을 따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저 세상에서 또 한 번의 기회는 원천 봉쇄되어 있다.(희랍정교회와 가톨릭교회는 내세의 영혼을 위한 중보의 효력을 믿지만) 그러다 보니까, 한 번 주어진 이생을 최선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생과 저 생을 주관하는 심판자 앞에 서게 될 날을 바라보면서 본의건 타의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 내세관을 가진 민족은 역사 속에 무언가 큰 업적을 남기기 쉽다. 반면, 앞서의 내세관에 비해 더 착취적이고 쟁취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비
판을 받는다.

최근 어떤 사람이 차라리 죽고 싶어 물 가를 찾아갔다가 죽음 뒤에 심판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기독교신앙 생활은 심판자 앞에 서는 바로 그 시간, 그 상황을 늘 염두에고 두고 사는 것이라 가르친다. 끝을 미리 보면 지혜를 얻는다고도 한다. 한해의 마지막을 미리
보면서, 인생의 끝도 미리 보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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