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프레드 할아버지

2005-11-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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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 배(시인, 수필가, 밴쿠버)

“Dont worry. Never mind. Everything goes well. 일주일에 두 번씩 프레드 할아버지는 꽃가게에 들렀다. 밴쿠버 시의 나나이모 거리에 있는 노인 전용 아파트에서 다운타운 가는 시내버스를 타셨다. 거동이 불편해서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이면서도 수요일과 토요일은 어김없이 우리 가게를 찾았다. 낡고 닳은 가죽지갑에서 5달러 지폐를 넉 장 꺼내면서 프레드 할아버지는 아내에게 주문했다. “Four bouquet. Make nice, please.(꽃다발 네 개. 잘 만들어주어야 해). 그러면 아내는 정성을 다해 부케 네 개를 만들었다. 그동안 프레드 할아버지는 가게 앞 BC주 주류 판매소에 가서 한 15불정도 하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한 병을 사 가지고 오셨다. 사실 5달러 정도로 꽃다발을 만들기는 무리였다. 그 돈으로는 장미 한 송이나 카네이션 너덧 송이 밖에 살 수 없었다. 그러나 80 고령에, 그를 돌봐주는 자원봉사자 여성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매주 꽃 선물을 빠트리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낭만을 꺾을 수는 없었다.
프레드 할아버지에게는 항상 밑지는 장사를 했었다. 아내는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생각했었다. 장인은 프레드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에 돌아 가셨다. 프레드 할아버지만큼 몸집은 없었으나 키는 비슷했고, 마음 씀씀이가 자상하셨다. 손자를 보려고 사직동 에서 도곡동 까지 먼 길을 버스 타고 오시던 장인 생각에 아내는 더욱 프레드 할아버지에게 각별했다.
프레드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태생이었다. 항공기 조정 관측사(항법사)로 아프리카, 유럽, 중동 등을 훠얼훨 날아 다니셨다. 젊은 시절에 결혼 한 적이 있었는데 사소한 일로 싸우고 헤어졌단다. 그 뒤로는 줄 곳 혼자 사셨는데, 사랑했던 여인과 별 것 아닌 일로 싸우고 떠나 보낸 일이 평생 후회가 된다고 했다. 여인은 다른 남자와 재혼해 버렸고, 그는 그리움 속에서 방황하다가 30여 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캐나다 동부에서 항법사 일을 했으나 나이가 들어서 더 오래 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다른 일들을 해 보았으나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밴쿠버로 이주해서 지금은 정부에서 주는 노령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일상생활을 돕기 위해 세 명의 자원봉사자가 온다. 식사준비를 해 주는 사람, 청소나 세탁 일을 해 주는 사람, 그리고 쇼핑이나 관공서 일 등 외부 심부름을 해 주는 사람, 이렇게 세 명이다. 그들은 모두 젊은 여성이다. 고맙기도 하겠지만, 그녀들을 보며 젊은 시절에 헤어진 연인 생각을 가끔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을 선물한다. 네 다발 사면 하나는 남지 않느냐니까 빙그레 웃는다. 마음속에 간직한 옛 애인에게 바치는 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저녁 위스키 한잔을 마신다. 양피가죽 쇼파에 몸을 파묻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눈만 피곤해 지기 때문이다.
노령에 술은 좋지 않으니 자제하시라고 권했다.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그랬더니 왈, 사람은 때가 되면 누구나 다 가는 거야. 사는 동안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야지. 그거 알아?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먼저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셨지. 먼저 만든 것들을 인간이 누리고 즐기라는 뜻 아니겠어? 그러면서 심장이 좋지 않아 많이는 못 마시고 딱 한 잔씩만 마신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두 주일 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고향 부모님 걱정하듯 안부가 궁금했다. 세 번째 주에 오셨는데 얼굴이 수척하고 걸음도 엉금엉금했다. 감기 들었노라고 했다. 그러나 아닌 듯 했다. 말수도 적어졌고 웃지도 않았다.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하소연하면 항상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Dont worry. Never mind. Everything goes well.)하면서 반백을 훨씬 넘긴 내게 젊으니까 좋은 일이 앞으로 많을 거라고 위로하던 그의 모습은 없었다. 아내가 버스정거장까지 부축을 해 주니까 어린애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Thank you. young lady. 하면서 버스에 오르셨다.
그것이 우리가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리고는 석 달 째 오지 않았다. 우리는 나나이모의 노인전용 아파트를 찾았다.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어 옆집 것을 눌렀다. 이웃 할머니가 나왔는데 석 달 전에 심장발작(Heart Attack)이 와서 두어 번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거의 의식불명이 되어 실려 갔다는 것이다. 참 점잖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우리는 빨리 완쾌해서 다시 뵙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왔다. 허나 기약 없는 바램이었다.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노인전용 아파트를 찾지 않았다. 애써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첫 이민생활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위로해 주던 스코틀랜드 할아버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향에서 노후를 연금생활에 의지하면서도 자원봉사자들에게 매주 잊지 않고 꽃을 사주던 그의 여유, 그의 낭만이 그립다. 거지로 살거나 왕으로 살거나 생명은 유한하건만 우리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그저 돈 버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 아닌지--
가끔 나는 기도한다. 프레드 할아버지.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한 잔의 위스키를 마시며 포근한 구름의자에 기대어 천상의 명곡을 감상하시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의 날이 다하여 천상에 오를 때 “여! 젊은이 어서 와. 여기 양가죽보다 부드러운 구름의자에 앉아 위스키나 한 잔 하게나. 한세상 사느라고 수고 많았네.” 하는 그의 환영인사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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