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름다운 배경

2005-11-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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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칼럼/이영철 목사(밴쿠버성결교회)

가라지 세일, 거기서 산 10호 사이즈의 유화 한 점.
당시 뒤늦은 유학 기념으로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던 동전들을 다모아 구입하였다. 그 후 20여년간 그는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서너번의 이사에도 불구하고 거실,침실,서재에서 당당한 한 식구로서 동거동락하였다. 그러다 이곳으로 옮긴 지난 봄부터는 가장 작은 외진 곳, 창고에 놓여지는 신세가 되었지만.....그림의 테두리가 되고 배경이 되어야 하는 액자가 많이 낡아졌기 때문이다.이런 연유로 그는 서서히 나와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가야만 했다.
지난 여름이다. 지인이 운영하는 겔러리에 초대전을 마친 작품들을 철수하면서 비싼 항공 운임관계상 액자들만 이곳에 남게 되었다. 한국의 어느 솜씨좋은 화방 일꾼이 밤새 정성드렸을 친구들. 비록 그들은 빈액자였지만 창고 한켠에 있기에는 아까운 친구들이었다. 먼 이국땅에 귀빈으로 방문했던 그녀들. 그러나 이제 반겨줄 짝이 없는 한, 그들은 어둠을 뒤집어 쓰고 그 아름다운 청춘의 때를 허비하고 말것이다.

종종 우리는 자신이 걸어온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은 그 배경이 여의치 않아 빛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의 실력과 재질이 부족해서가 아닌 그를 둘러싼 주변 사정이나 여건으로 인해서인 경우로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꿈도 펼쳐보지 못하고.....특히 우리 이민사회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전시장에 작품처럼 액자가 되기도하고 그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액자가 되어주어야 할 때가 드물지 않음을 보게된다. 그 사람의 배경이 되어 주는 일이다. 자신으로 인해 그 사람이 위로와 용기를 가진다면, 더 나은 삶과 가치를 얻는다면, 좌절과 죽음의 기로에서 발길을 돌린다면 얼마나 보람되는 일일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이 그림이 될 때에 멋진 액자가 나를 감싸주기를 원한다. 누군가 이왕이면 든든하고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기를 말이다. 한결 힘을 내서 무슨 일이든 할 것같지 않는가. 얼굴에는 미소가 걸음에는 넉넉함이 배여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배경을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자신부터 아름다워 질일이다. 이를 외면한 채 남의 아름다움만 골라 쫓아 다니는 사람은 ‘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만을 챙기는’ 얌체인 뻐꾹이같은 사람, 가까이 하기엔 힘든 빈대같은 사람으로 불리우기 십상이다. 배경이 아름다워지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이웃의 삶에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한다. 나는 어느 누구의 아름다운 배경이 한번쯤이라도 되어 보았는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가진자가 없는 자를, 배운자가 배우지 못한자를, 정상인이 장애인을, 잘하는 자가 못하는 자를,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큰자가 작은 자를, 건강한 자가 아픈 자를 경시하는 일들은, 그리고 남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아름다움보다는 추함을, 칭찬보다 비판을 즐기는 일들은 스스로 자신의 배경을 무너뜨리게 하는 일이다. 한 사회, 국가가 그렇다면 낙후와 후진에 머물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은은한 달빛이 호수를 빛내주는 것을, 밤하늘의 어둠이 별빛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보라. 담장 밑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을 익어가게 하는 것을, 한 점의 노을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자를 황홀에 젖게 하는 것을 보라. 우리도 그런 배경의 이미지와 소리,색갈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비단 자신의 존재가 작고 적게 느껴질지라도 난 너에게, 너는 나에게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과연 만남,관계,사랑,신앙,인생이란 진지한 명제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며칠전 이들은 나의 소개로 한 짝을 이루게 되었다. 이 토박이 그림을 만난 이방땅에 떨어진 이 액자는 간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처음보는 순간, 서로는 얼마나 마음이 꽁당꽁당 뛰었을까. 아직도 자신의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어보고 있겠지.
이 신혼부부는 우리집 거실 정중앙, 백합꽃들과 수선화가 있는 꽃병 윗편에 자리잡았다. 그윽한 삶의 향기 가득한 이웃들, 변함없이 서로의 사랑을 잊지 않는 친구가 사는 바로 그 동네로 말이다.

서로가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줄일이다. 단 돈 5불짜리 유화 한 점, 그리고 외톨이 액자도 서로가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보라,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인생 속에 남은 시간들은 점점 줄어만 가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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