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부 나들이

2005-11-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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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상순에 동부에 다녀왔다. 필라델피아에서 조카 결혼식을 축하하고 보스턴의 동생네에 들르는, 달포전에 계획된 일정이었다. 수년전에 그 곳에 갔을 때엔 한국의 가을을 닮은 높고 맑은 하늘이 인상적이었기에 우리는 그 청량한 계절을 만끽할 기대로 부풀었다.
오전에 LA를 출발하였는데 한국인 승객없는 어색함 가운데 3시간이 당겨진 동부시간으로 도착한 필라델피아의 밤은 촉촉했고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비 내리는 야경이 우리를 맞았다.
걱정했던 날씨는 개이지 않았고 다음날 교회에서의 결혼과 컨트리클럽에서의 연회까지, 굵은 빗줄기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왕복의 교통이 불편할 하객에게 마음이 쓰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비가와야 돼요. 그동안 너무 가물었거든요”하며 궂은 날씨를 개의치 않는 배려를 보였다.
어두운 길을 달려와 축하연에 참석한 지인들은, 새로운 의사 부부를 위해 익숙하고 편안한 자세로 즐거움을 같이 했다. 이 자리까지의 힘들었을 노력이 기쁨으로 승화된 아름다운 분위기였는데 밤늦도록 어울리며 축복하는 친지들의 사랑과 세련된 매너는 그들의 성숙한 삶의 내용을 느끼게 했다.
다음 날, 폭우속에 우산을 받쳐 들고,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을 둘러보았다. 짧은 연륜에 이룩한 미국 성장의 역사를, 사실화한 당시의 거리와 복장으로 재현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보스턴을 향해 가는 중에도 비는 여전히 내려서 차 운행이 조심스런 가운데 콘도미니엄 형식의 집들, 창문이 크지 않은 뉴잉글랜드 지역 식민지 시대 스타일의 집들이 눈에 띄었다.
이튿날부터 보스턴이 초행인 동행을 위해서 명문대와 고풍스런 채플들, 황금색 돔형 지붕의 주청사와 교각모양의 시청, 쓸쓸한 겉모습에 성조기가 외로운 ‘롱펠로우’의 생가 등, 찰스강을 끼고 운치 있는 시내를 돌았는데, 낮게 흐리고 쌀쌀한 날씨와 두터운 복장의 시민들 모습이 초겨울의 풍경 같 았다 .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정원묘지인 ‘마운트 어번 세미트리’의 특이한 인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플리머스에서 오른 메이플라워호에선 청교도들의 용기를 되새기기도 했다. 시원한 대서양의 바람을 쐬며 해변의 운치에 젖기도 하며 일주일만에 차분하고 고전적인 문화의 도시 보스턴을 떠 났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끝내 보지 못하고 비와 흐린 날 속에서 드문드문 스쳐본 붉은 단풍에 만족할 수밖에 없던 바깥나들이였지만, 자연을 대표해서 사과한다는 동생의 조크에 짙은 아쉬움을 달랬다 .
LA에 도착하여 공항을 나서는데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모처럼의 여행이 뜻하지 않은 기상 이변으로 불편했지만, 정다웠던 그곳에서의 훈훈한 기억은 한동안 나의 피돌기에 힘을 보탤 것 같다 .

이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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