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로 돌아가다

2005-11-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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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처럼 한국말로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몇 마디가 있다. 이 몇 마디는 한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한달 동안 반복하여 사용하였기에 나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인사를 할 때 사용한 한 마디로 “나는 1972년 11월27일에 한국에 왔습니다”이고 다른 한 구절은 “나는 평화 봉사단원입니다”이다.
요즈음 한국인 젊은 학생들에게 두 번째 구절을 한국말로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나는 천천히 “평-화-봉-사-단” 하고 발음한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낱말은 알아듣는데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다.
미국 평화봉사단은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첫 번째 디렉터는 사전트 슈라이버이다(그는 현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장인이다). 평화봉사단은 젊은 청년들에게 개발도상국에 가서 살면서 평화를 전하고 그 나라에 유익한 일을 하면서 조국을 섬기라고 도전한다.
다음 세 가지는 평화봉사단의 미션의 목적을 간단히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주재 국가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지도자 양성 훈련을 돕는다. 둘째, 주재 국가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형성하도록 돕는다. 셋째, 미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평화봉사단이 창설된 후 지금까지 44년 동안 17만8,000명의 단원들이 138개 국가에서 봉사하여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7,755명의 봉사단원들이 72개국에서 일하고 있다. 평화봉사단이 한국으로 들어간 해는 1966년이다.
나는 ‘K-25’로 30명의 동기생들이 있다. ‘K’는 Korea라는 뜻이며 한국에 들어간 25번째 그룹이라는 뜻이다. 우리 봉사단원들은 세 분야에서 일하였다. 단원들은 대학교, 중·고등학교, 또는 지방에 있는 보건소로 발령 받았다. 나는 중학교에서 영어 선생으로 일하였고, 어떤 친구들은 대학교에서, 어떤 친구들은 보건소에서 일하였다.
1975년께 한국은 ‘개발도상국’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면서 평화봉사단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9년 있었는데, 그동안 많은 일을 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평화봉사단을 기억하는 나이 든 한국 사람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그들의 나라로 봉사 나온 이상적인 젊은 청년들을 지금도 좋게 기억하는 것을 보게 된다(아마도 당신이 그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봉사기간은 2년인데, 나는 1년 반으로 끝을 맺었다. 아내와 결혼하려고 하였을 때 평화봉사단 본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미국인 젊은 청년 봉사단원으로서 현지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사표를 내야 하였다. 물론 나의 아내도 교직에서 사임하였다. 왜 이 옛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서 사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때 평화봉사단원들을 사람들은 ‘세속적인 선교사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미국식 생활방식을 전하는 전도자 역할을 하는 우리들을 ‘USA를 위한 젊은 대사들’이라고 하였다.
나는 르완다에서 캠퍼스 선교를 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떠나고 있다. 지금 나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간다. 선교사는 예수님을 대변하는 대사이다. 평화봉사단의 미션 세 가지 목표가 현재 나의 앞에 있는 아프리카 캠퍼스 선교 목표와 아주 흡사한 점을 발견한다.
첫째, 아프리카 크리스천 학생들을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와서 아프리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 양성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둘째, 미국 단기 선교단원들이 아프리카 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다리역할을 한다. 셋째, 미국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풍부한 문화를 접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화살을 쏘았을 때 화살이 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 원형을 그리며 날아가듯이 나도 첫 직업이 ‘세속적인 선교사’로 시작하여 진짜 선교사로 종착점에 도달하였다.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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