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 투표소 풍경

2005-11-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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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투표소를 보면 왠지 허술해 보인다. 한국에서 투표소하면 입구에서부터 경계를 서는 경찰과 맞닥드려지고 선거를 위해 차출된 투표소 종사자들의 잘 차려입은 근엄한 표정이 들어오는 사람들의 기를 꺾는, 구석구석 도장자국과 굳센 자물쇠로 채워진 투표함이 비치된 학교 같은 곳이 떠오른다.
여기서는 적당히 입고 어른인지 아이인지 그런 사람도 앉아있는가 하면,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도 있다. 투표장 선정도 자원 형식이기에 주택 차고가 투표소로 이용되기도 하고 투표함은 선거물품을 담았던 검정 플라스틱 통에 일회용 열쇠를 달아 사용한다.
분위기도 수수하다. 선거 날이 노는 날이 아니기에 잠깐 나와서 투표를 하거나 일과를 마치고 투표하러 간다. 신분증을 보자는 일도 없고 명단에 이름이 없으면 정직성을 확인하는 글을 읽고 이름 쓰고 투표를 하게 한다. 잘 모르면 기표소 안에까지 따라 들어와 도와준다.
8일 특별 선거날 이른 새벽 노웍 LA카운티 선거국 사무실에는 대형 상황판이 세워지고 투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만반의 대비에 들어갔다. 오전에 LA카운티 산하 2,000여 투표소 중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적으로 투표소가 개설되었다는 발표가 있자 여기 저기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투표하러 갔다가 자신의 명부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선거요원의 실수로 이미 조기투표를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확인절차를 거친 후 정식투표를 했단다. 한 경찰관은 근무 중 무심코 투표하러 갔다가 인스펙터(책임봉사자)가 총 차고 있는 경찰관은 절대 투표하게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선거국 사무실에서 수퍼바이저가 직접 전화를 해서 투표를 허용하도록 요청했으나 막무가내로 자기주장을 꺾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유권자가 몰려드는 시간대에 투표장 주위는 활기를 띄었으나 새로 바뀐 투표지 규격에 적응이 안돼 많은 유권자들이 잉크가 잘 안나와서 힘들다는 원성도 들려온다. 갖가지의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불편사항들이 접수되는 와중에도 의도적인 선거부정이 있었다는 보고는 없다.
노웍의 사무실 모니터가 한국산 LCD로 교체되고 “쌤쏜, 쌤쏜”(삼성 셀폰) 혀 꼬부라진 음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한인 유권자가 다 나가서 투표를 해도 인구 비율로 따져보면 얼마되지 않는데 우리가 투표만큼은 정말 꼭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든다.
투표종료 시간에 맞추어 수퍼바이저를 비롯한 선거 참모진과 스탭들이 상황판 앞에 모여 박수갈채와 함께 현란한(?) 댄스 세리머니를 펼치며 서로 끌어안고 아이들 같이 좋아하는 모습이 천진스럽게 보였다. 엉성하게 보이는 투표장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힘이 느껴진다.


임학준
LA카운티
선거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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