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남- 그 인연의 소중함

2005-11-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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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 칼럼/석중 혜주 스님(불정사 주지)

세상에서 부부(夫婦)를 가리켜 반려자(伴侶者)라고들 한다. 혼자보다는 아무래도 둘이서 벗삼아 오순도순 서로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움과 멋이 있다 하겠다.
절 집안에서의 벗은 도반(道伴)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修行者)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했지만, 동도(同道)의 벗이 있음으로 커다란 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단호히 세속과 인연을 끊고, 일대사 인연을 성취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처음 입산(入山)했던 행자시절(行者時節),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단한 육신을 올곳이 다잡아 성성(惺惺)한 마음과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세속(世俗)의 습기(習氣)를 털어 내려 했던 것은 고락을 같이했던 도반들이 있었기에 더욱 더 그러했다.
절 집안에는 도반도 많다. 행자시절에는 행자도반, 강원에서는 강원도반, 선원도반, 토굴도반 등….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인 것이다.
원효스님은 우리 민족의 대사상가로서 존경을 받지만, 일연(一然)선사는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함으로서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우리 겨레에 대한 지극한 애착을 갖지 않았다면 세속의 일에는 초월한 경지에서 어찌 그러한 책을 썼겠는가. 사라져 가는 민족의 정신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심정으로 저술하였으리라. 그러나 요즘의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자만이 대한민국사람이다 라는 언론의 보도를 대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가는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의 분상(分上)에서는 세계일화(世界一花)이니 동서가 없고 남북이 없으련만, 우리는 위대한 배달민족의 후손으로서 만나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또 간과해서는 안될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인연이 있다. 바로 부모와의 만남이다.
너무나 숭고한 인연이므로 그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손상시키는 일이므로 우리는 언급을 회피하기로 하자.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인연을 꼽으라면 단연코 불법(佛法)과의 만남이라 하겠다. 아직 사춘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읽은 소설 사명대사는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나로 하여금 주저함이 없이 꽃다운 열 여섯에 산문(山門)을 두드리게 했다.
어떠한 종류의 마력(魔力)인지는 몰라도 어린 시절의 산중생활(山中生活)은 아직도 나에게 맑디맑은 향기로서 머물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되는 가을의 초입(初入)에서 아직도 뜨거운 여름의 강렬한 여기(餘氣)가 따끈하게 느껴지는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의 어느 날 오후, 도반들과 함께 밭에서 갓 따온 깻잎에 찹쌀 풀을 입혀 섶에다 촘촘히 널어 양지바른 곳에 말려두고 통통한 알들이 가지런히 박힌 샛노란 옥수수를 한 동이 삶아 두 뺨과 등줄에 줄줄이 흐르는 땀을 식히려 큰절 앞 개울에 그대로 뛰어들어 물장난을 치다가는 잘 달구어진 반석(磐石)에 올라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제, 졸졸거리는 시냇물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여기저기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 너울들이 보석처럼 내 안중(眼中)으로 휘황 찬란히 부서져 올 때 나는 이미 저 깊은 심연(深淵)속으로 한없는 희열(喜悅)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은 그렇게 맑고 투명(透明)했다.
이제 시선을 우리 주변으로 돌아보면, 동시대(同時代)에 밴쿠버라는 공간에서 우리 모두가 동업중생(同業衆生)으로서 만나고 있다. 저마다 생각이 틀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지만 순간순간 서로가 만남의 연속으로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만나는 사람 사람마다 한결같이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져 우리의 앞날을 찬란히 빛나게 함은 이 또한 인생의 지극한 복락(福樂)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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