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자랑스런 멕시칸 아들

2005-11-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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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고추를 매달아 놓을 일이 생겼다. 계획에 없던 아들이 생긴 것이다. 기저귀 한번 갈아주지 않고도 24세나 된 변호사 아들을 공짜로 얻었으니 어찌 동네방네 알리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 대학에선 매해 봄방학이면 10여명의 학생들이 멕시코시티의 YMCA 대학에 간다. 그 곳 학생이나 관계자의 집에 묵으면서 YMCA와 관련된 봉사단체에서 영어교습, 집수리 등의 봉사활동을 한다.
지난주엔 멕시코의 대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였다. 7년전 이 프로그램이 생긴이래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미국 학생들보다 해외 여행이 힘들어 감히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9.11사건 이후 미국비자 받기가 힘들어진 건 멕시코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캔터키주 상원의원이 멕시코의 미국 대사관에 입김을 넣기까지 했다.
우리 집에 묵은 청일점 ‘호세’는 졸업생이지만 아직까지 YMCA 활동이 활발하여 동행했다. 안정된 직장과 넉넉한 집안 형편덕에 미국비자는 가장 쉽게 받았겠지만, 우리 학생들은 그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학생시절 알콜 중독자로 그들을 힘들게 한 모양이었다. 결국 지도교수로 멕시코에 가끔 동행하는 남편이 그를 맡게 되었다.
멕시코의 민박제공 가족들이 우리 학생들을 아들, 딸이라 불렀듯, 우리 가족도 그를 아들로 맞았다. 학교로부터 재활훈련 후 금주상태이니 주의하라는 얘기를 듣고 집 안팎의 술병이란 술병을 모두 감춰 놓았는데, 그가 태킬라 글래스 세트를 선물로 내놓아 황당했던 일은 결코 잊지 못하리라.
미술가 프리다 칼로를 닮은 그는 키가 작고 똘똘하며 재치가 있었다. 다섯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그의 가슴 한 곳에 있을 빈자리가 휑하게 느껴와, 일주일이지만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그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줄 것을 다짐했다.
북 캔터키와 신시내티의 남미인 봉사단체에서 페인트칠을, YMCA에서 캠프를, 근처 관광지에서 구경을 하는 동안, 그와는 물론 다른 학생들과도 친해졌다. 특히 영어 못하는 카니와 스페인어 못하는 내가 한 호텔방을 쓰면서 스페인어 회화책 한 권을 통해 보냈던 즐거운 시간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박물관 구경이나 고등학교 수업참관 보다는 샤핑을 즐겼다. 시간만 나면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한번가면 옷가지와 장식품 등으로 차의 트렁크가 터질 지경이었다.
우리 학생들이 멕시코에 갔을 땐 동네 골목이나 시장에서 일상생활, 민속적인 것 등을 보면서 민속품을 사고 싶은데, 그 곳 사람들은 이들을 굳이 백화점에 데려가려 했다고 한다. 멕시칸 대중음식점에 가자고 해도 고급 양식당에 데려가 미국에서 노상 먹는 음식을 사 먹이면서 큰돈을 썼다고 한다.
외국손님을 대하는 한국인의 극진한 마음씀과 닮았다고 할까. 미국인 남편이 처음 한국에 갔을 때 동네구경 간다는 것을 막고 워커힐 쇼에 끌고 간 친정아버지의 배려도, 냉면만 먹겠다는데 꼭 갈비를 먹인 후에야 냉면을 시켜주던 친지들의 정성도 그랬으니.
이들과 함께 가게나 식당엘 들어가면 청소하던 멕시코인들이 그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최근 몇년 사이 이곳 중서부에도 멕시코인의 숫자가 갑자기 늘었고 그들은 대개 막일을 하는데, 미국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여유 있게 관광하는 멕시코인들의 모습이 그들에겐 생경했을 터이다. 이젠 남 같이 느낄 수 없게 된 터라 그들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호세를 몇 년 동안 봐 왔던 우리 학생들과 교수들은 그가 기특하도록 많이 변했다고 흐뭇해하면서 웃기는 재주를 타고난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술 주정하면서 가진 것을 자랑하고 노란 머리 여학생들만 따라 다니던 철부지가, 술 주정은커녕 제 것보다 남의 것을 먼저 챙겨주고 문제가 생기면 뭐든 나서서 해결했던 것이다. 멕시코 요리를 멋지게 차려주기도 했다. 태권도 학교에서 배운 ‘하나, 둘, …, 열’ ‘앞차기’ 등을 읊으며 한국말, 문화, 음식을 열심히 배우던 그가, 나는 더더욱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는 날 공항에서 내년에 멕시코에서 만날 것을 다짐하며 부둥켜안았을 때, 소리 죽여 우는 호세의 격렬한 흐느낌이 가슴에 전해져 왔다. 그의 가슴 속 엄마의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들어 준 건 아닐까. 아니,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으리. 내 가슴에 생겨버린 그의 자리를 휑하게 비워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보경
북 켄터키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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