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펭귄들의 행진

2005-10-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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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펭귄. 검은 턱시도의 점잖은 용모와 뒤뚱대는 친근한 몸가짐. 그리고 가족을 목숨걸고 돌보는 심성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펭귄. 그 중에서도 나는 황제 펭귄이다. 17종에 이르는 펭귄 가족 중 가장 커서 사람의 2/3 정도나 되는 황제 펭귄. 비록 날개가 짧아 날지 못하나 나는 엄연한 새다. 알을 낳고, 깃털로 덮인 몸매에, 피가 따뜻한 온혈동물로 20여 년을 사는 새. 수 천만년 동안 바다생활이 익숙해져 날개가 물갈퀴로 변하도록 바다를 날아다닌 새. 뭍에선 사람을, 바다에선 물고기를 닮은 새.
얼마 전 뤽 작케란 프랑스 인이 우리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겠다고 했을 때 사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바스코 다 가마와 마젤란 등이 우리를 처음 발견 한 후, 불과 500여 년만에 32종이나 되는 펭귄 가족들이 멸종된 뼈아픈 사실 때문이다. 인간들은 우리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았다. 살과 알을 먹이와 사료로, 기름을 땔감으로, 가죽을 벗겨 옷과 장식을 만들었다. 우리의 삶터에서 우리의 먹이를 약탈했고 심지어 보금자리마저 걷어 비료로 썼다.
그러나 단언하건 데 우리는 생존자들이다. 수천만 년 동안 혹한과 포획의 세월을 이겨낸 적자들이다. 작케가 만든 영화 ‘펭귄의 행진’은 우리의 여정을 잘 그렸다고 생각한다. 펭귄 가족간의 사랑, 일부일처의 도덕성, 새끼들을 위한 희생, 냉혹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투지, 새끼들이 크면 미련 없이 떠나보내는 지혜 등을 과장 없이 잘 포착하고 있다.
영상에 담긴 대로 우리의 한해는 남극에 여름이 찾아오는 2월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맘 때 면 바다에서 마음껏 배불린다. 그리고 은밀한 내륙 - 선대로부터 번식의 장소로 사용된 오모크란 장소로 이동한다. 수천 마리가 일렬 종대로 서서 70~80마일 떨어진 내지로 걷는다. 사실 우리의 강하고 짧은 다리는 몸 맨 뒤편에 있어 걷기가 쉽다. 이 다리의 위치는 물 속에서 유영이 쉽도록 한 조물주의 배려다. 며칠후 오모크에 도착하면 우리는 짝을 짓는다. 수천 마리의 짝들은 불협화음의 함성 속에 잔치를 벌인다.
5월말이면 어미들은 알을 낳는다. 그리고 알을 배 밑 주머니에 넣어 보호한다. 어미들은 이미 체중의 1/3이 빠져있다. 생명을 잃기 전에 바다로 다시 가 먹어야 한다. 어미는 알을 아비의 배 밑 주머니로 밀어 넣는다. 재빠르지 않으면 알은 혹한 속에 얼어 깨지고 만다. 우리 아비들은 어미가 다시 돌아올 두 달 동안 알을 발등 위에 놓고 지킨다. 아비들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둘러서서 시속 100마일의 강풍과 영하 70도의 혹한을 부리(?)를 악물고 이겨낸다.
7월 중순 알들이 부화한다. 막 알에서 나온 새끼는 우리 아비의 입에서 나온 영양 엑기스로 며칠간 연명한다. 바다로 돌아간 어미들이 이제 돌아올 시간이다. 어미들은 오자마자 먹이를 토해 새끼들을 먹인다. 근 여섯 달을 굶어 체중이 25파운드 이상 빠진 우리 아비들이 이제 바다로 나가 배를 채울 시간이다.
나는 황제 펭귄. 우리가 터득한 생존의 비결은 가족 사랑과 협동심이다. 적당 주의와 안일, 이기심과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 이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수천만 년을 생존해 온 우리는 진정한 승리자들이라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다.

김희봉 수필가 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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