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울너럭/소유와 향유

2005-10-11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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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크라멘토 향기로운 교회 이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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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무언가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세 시간 넘게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나를 살며시 밖으로 인도한다. 싸늘한 공기가 무척이나 신선하다. 검푸른 가을 밤하늘을 영롱하게 수놓은 낯익은 별자리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 뛰쳐나온 나를 말없이 환영한다. 순간,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광대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인간의 눈에는 한 점에 불과한 저 창공의 별들 중 하나인 지구, 그 푸른 땅덩어리에 한 점으로 살아가는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2억 5천만년이 넘었다는 우주의 역사에 비해 7~80년 살아가는 인생은 또한 얼마나 짧은 시간일까?
오늘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테러와 태풍 그리고 산불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슬픔과 좌절의 늪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 모두는 슬픔만큼이나 진한 불안에 휩싸여 있지 않은가? 언론은 “다음은 캘리포니아 대지진!”이라고 우리의 불안에 휘발유를 끼얹고 있다. 정말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은 일상의 화두(話頭)가 되었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형성하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추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불안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인간의 삶의 거북한 동반자다. 다만 불안하게 하는 국면이 달라졌을 뿐이다.

불안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생명을 상실할까 두렵기에, 사는 동안 일궈놓은 소유를 한순간에 상실할까 두렵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긴다. 인간인 한 이 본질적인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려 살 이유 또한 없다. 왜냐하면,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말처럼, “인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우리가 ‘내 것’ 만들기에 급급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사실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내 것―내 집, 내 재산, 내 생명 등―이 있는 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스님의 지혜처럼 ‘무소유’(無所有)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불안이 줄어들고 감사가 늘어나는 삶의 질적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다만 더 건전하고 신앙적인 가치관을 통해 불안 즉 상실에 대한 염려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는 있을 것이다. 아! 삶의 참된 지혜와 깨달음이, 신앙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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