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낯선 고향

2005-09-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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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다가 처음 미국으로 돌아오려 하였을 때 나는 가난한 젊은 청년이었다.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한 방법으로 한국 고아들을 비행기 안에서 돌보는 보호자 역할을 하면 비행기를 싸게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4년 4월부터 8월까지 홀트 양자회에 내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9월10일 고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라는 소식이었다.
서울에 있는 홀트 양자회 사무실로 짐을 가지고 와서 고아들을 인계 받았다. 아기들을 임시로 돌보던 보모들이 소리내어 우는 아기들을 에스코트들에게 넘겨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기들과의 슬픈 이별이었다. 5명의 에스코트들로 구성된 우리 그룹은 6개월 미만의 신생아 8명, 한살짜리 남자아이와 네살짜리 남자아이를 합하여 10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한산한 비행기 뒤쪽 좌석들을 차지하고는 아기들을 돌보았다.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나머지 아이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기들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는 아기를 안고 통로를 왔다갔다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며 태평양을 건너왔다.
미국에 처음 오는 아내는 아기 2명을 데리고 시애틀에서 혼자 내렸다. 한 여자 에스코트는 시카고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내렸다. 선교사 부부와 나는 6명의 아기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왔다.
31년전 9월11일, 고아들을 태운 노스웨스트 비행기가 JFK 공항에 도착하였다. 입양 부모들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통통하게 생긴 여자아기를 들어 올리며 이름표에 적힌 이름을 “매튜”(Matthew)하고 외쳤다. 보스턴에서 온 젊은 부부가 기쁜 함성을 지르며 뛰어와서 분홍 드레스를 입은 아기를 받았다.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양부모들과 잠시동안 인사를 나누고 나는 그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시애틀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며칠 전 크로니클지에 “한국에서 태어난 고아들이 자기들이 모르는 고향으로 돌아가다”라는 기사를 읽으면서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입양아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되돌아가 사는 이야기이다. 내가 1974년 에스코트하고 왔던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이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1950년부터 15만명 정도의 한국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2,00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입양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입양인들은 미국에 남아 있지만 소수는 자기의 출생지인 한국으로 돌아갔다. 대부분 20~30대인 이들은 자기의 타고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서 돌아갔다. 그들은 조상들의 문화를 알고 친부모를 만나기 위하여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국제입양을 중단하는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서이기도 하다.
서울에 200여명의 입양인들이 매주 만나 서로 돕는 단체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직장을 알선하여 주고 아파트를 찾아 주고 헤어진 친부모를 찾아 준다. 온라인 토론에 참가하고 뉴스레터를 발행하기도 한다.
입양인들의 권리를 위해 정치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입양아들의 필요를 알리면서 한국 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일에 전념하기도 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입양아 출신들이 한국에서 머물면서 땅을 사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자기 고향을 전혀 몰랐던 입양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왜 이처럼 부자인 나라에서 아직도 고아들을 외국으로 수출하는가? 왜 1년에 2,000명의 아이들에게 한국 안에서 보금자리를 찾아 주지 못하는가?
나는 31년 전 뉴욕에서 젊은 부부 품에 안겼던 그 통통한 여자아이를 생각한다. 그 여자아이가 미국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그 여자아이는 내가 그녀를 한국에서 슬퍼하는 보모의 품에서 끌어내 기뻐하는 미국인 양부모의 품에 안겨준 것을 원망하며 살고 있을까?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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