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와인이 상했다고요?”

2005-09-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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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크 마개가 변질돼서’
‘보관 잘못해서’둘 중 하나

단 맛·새콤한 맛·떫은 맛외 다른 맛이 강하게 느껴지면 의심을

얼마전 한인타운의 꽤 큰 중식당에서 여러 사람과 회식을 한 적이 있다. 점심이었지만 가볍게 와인 한잔씩 곁들이자는 의견이 모아져 레드 와인을 한병 시키기로 했다.
와인 리스트가 따로 없어서 웨이터에게 무슨 와인이 있냐고 했더니 ‘조던’(Jordan)이 있다고 하였다. 소노마 카운티에 와이너리가 있는 조던은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와인이므로 카버네 소비뇽을 한 병 주문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들고 와서 코르크 마개를 열고 따라준 와인을 맛본 순간, 시큼한 맛이 확 느껴졌다. 상한 것이었다. 조던의 카버네는 벨벳처럼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매혹적이기 때문에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었다. 98년 산이었으니 보관을 잘 못해서 맛이 간 것 같았다.
웨이터를 불러 와인이 상했다고 했더니 미안해하면서 다른 병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새로 가져온 조던 카버네는 2000년 산. 와인을 따서 다시 한 잔 맛보았다.
으~ 이것도 상했다. 도대체 이 식당은 와인을 어떻게 보관했길래 불과 몇 년새 맛이 이렇게 변질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했으니 새 와인을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식당 잘못이라고 해도 병당 소매가격이 45달러 정도, 식당에서는 적어도 70~80달러는 받는 와인이라 그쯤에서 그만 두기로 했다.
와인의 맛이 변질되는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보관을 잘 못해서 상한 경우로 이럴 때의 와인 맛은 과일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시큼한 맛이 압도적이다.(너무 오래 돼서 수명을 다한 와인에서도 비슷한 맛이 난다)
또 하나는 코르크 마개에 박테리아가 번식해 그 냄새가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친 경우다.
이것을 영어로 ‘콜크드’(corked) 됐다고 표현하는데 이런 와인에서는 곰팡이 맛, 젖은 낙엽냄새, 오래된 서가에서 맡아지는 먼지냄새, 퀴퀴한 맛이 느껴진다. 변질된 정도에 따라 거의 못 느낄 수도 있지만 심하게 상한 와인도 적지 않다.
코르크가 상할 확률은 전체의 3~5% 쯤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며 운 나쁘면 누구나 그런 와인을 살 수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콜크드 된 와인을 마신 경험이 적지 않다.
코르크 업계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플라스틱 코르크나 스크루 캡으로 대체하는 와이너리들이 늘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와인 업계에서는 인조 코르크와 스크루 캡을 사용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변질된 와인의 맛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 와인 맛이 이런가보다 하면서 마시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중식당에서의 조던 와인도 함께 식사한 열명쯤 되는 사람들이 아무도 상한 줄 알지 못했다. 내가 상했다고 하자 다들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이런게 상한 맛이야?” “잘 모르겠는데” “우리끼리 마셨으면 그냥 그런줄 알고 다 마셨을텐데”였다.
사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상한 맛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싸구려 와인 중에 상한 와인과 비슷한 맛을 내는 와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과일향(단맛)과 산도(새콤한 맛), 그리고 적포도주의 경우 태닌(떫은 맛) 외에 다른 맛이 압도적으로 느껴지면 상했는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참고로 상한 와인은 인체에는 아무 해가 없다.
그러면 와인을 사왔는데 맛이 상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와인샵에 따라서 와인을 도로 가져가서 물어달라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주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보관을 잘못해 상한 경우는 와인샵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상한 코르크에 의해 변질된 것은 와인샵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금방 사온 와인이 상한 것을 발견했을 때는 바꾸기가 쉬운데 사놓고 몇 달 후 혹은 몇 년 후 마시려고 보니 상해있을 때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상했는지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식당에서 주문한 와인이 상한 경우, 거의 모든 식당은 새로운 와인으로 대체해준다. 이유는 식당 측에 책임이 있어서라기보다 서비스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소믈리에가 와인의 마개를 열고 처음에 주문한 사람의 잔에만 조금 따라주는 이유는 와인이 상했는지 아닌지를 맛보라는 절차다. 그러므로 첫 잔을 시음하는 사람은 와인 맛을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 맛이 변질된 와인에서는 과일향이 느껴지지 않고 시큼한 맛이 압도적이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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