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왕대의 고향

2005-09-13 (화)
크게 작게
왕대(王大)는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소설 `위대한 왕`에 나오는 주인공 호랑이 이름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생 잡지 `학원`에 연재되던 그 소설의 매력과 감흥을 나는 만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지 못한다.
소설은 송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만주 빠이러 산의 바위굴에서 태어난 새끼 호랑이 왕대가 어미 호랑이를 떠나 홀로 서기를 배우는 과정으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왕대는 훗날 왕이 되는데 필요한 많은 좌절과 시련을 겪는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온 멧돼지를 사냥하다 호되게 반격을 당하기도 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호랑이 역시 왕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 필요함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왕대로 불렸던 것은 얼굴 한복판에 큼직하게 새겨진 임금 왕(王)자와 큰 대(大)자 무늬 때문인데, 밀림 주변의 인간들에게 주인공은 말 그대로 왕이자 신이었다.
밀렵이나 독극물을 쓰는 비겁한 사냥꾼이 왕대와 부닥칠 경우 두개골이 한입에 바스러져 나갔다. 대신 때맞춰 산신제를 올리는 선량한 촌로 한테 왕대는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는 영물로 비쳐있다.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장성한 왕대가 아버지 호랑이의 고향 백두산을 향한 긴 여정에 오르는 장면인데, 이 대목을 읽다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질렀던 소년 시절의 기억이 지금껏 새롭다. 왕대는 전형적인 우리의 백두산 호랑이였던 것이다. 학명은 시베리아 호랑이, 중국은 이를 동북 호랑이라 부른다.
지난 주 중국 출장 중 하얼빈 근교의 호림원(虎林園)에 들렀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시 어디에나 흔히 있을 법한 동물원 정도로 알고 왔다가 그곳에서 내 기억 깊은 저변에 아직껏 늠름히 엄존하는 그 백두산 호랑이와 부닥친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닌 300 여 마리의 백두산 호랑이가 떼를 지어 대형 사육장에서 방사되고 있는 현장을 상상해 보라. 한 때 멸종 설까지 떠돌지 않았던가. 나의 가슴은 요동쳤다. 아, 왕대가 살아있다니, 저처럼 떼거리로 살아있다니!
호랑이 떼 모두의 머리에 왕자와 대자 무늬가 뚜렸했다. 또 저마다 왕대 특유의 기상과 오만이 넘쳐흘렀다. 일행이 아프리카 사파리 식 소형 버스에 올라 무리 한 가운데로 접근했는데도 놀라거나 지분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하거나 길을 비키지도 않았다.
그 늠름함이 내게는 무언의 시위로 와 닿는다. 나는 백두산 출신이란 말이다…….
그렇게 느껴서일까, 한 마리 한 마리 주의 깊게 살폈으나 우리에게 눈 하나 주지 않았다. 초가을의 풀밭 위에 뒹굴거나 연못에 뛰어들어 물장난을 치면서도 정작 사파리 버스를 의식하는 호랑이는 한 마리도 없었다.
어쩌다 우리 쪽을 쳐다보는 놈도 없지 않았으나 기실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등 너머 먼발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등을 돌려 뒤를 쳐다봤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광활하다 못해 허전한 생각까지 드는 흑룡강 성 벌판일 뿐이다. 흑룡강 성(省)의 크기는 45만 평방 km.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두 배나 큰 성이다. 그렇다면 호랑이들이 정작 보는데는 어딜까.
나는 불쑥 백두산이 여기서 얼마나 되느냐고 안내에게 물었다. 동남쪽으로 3백 킬로,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5시간 이상을 달려야 백두산에 닿는다는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 그렇지! 호랑이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바로 그 백두산임에 틀림없어! 또 한번 쾌재를 부른 것은, 호림원을 나와 하얼빈 시의 밤거리를 걷던 중 중앙로라는 산책길 푯말이 나타났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송화강 강줄기가 가로지른다는 안내를 듣고 나서다. 송화강이 바로 하얼빈 시내를 관류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왕대의 고향이 어디던가. 바로 그 송화강이 내려다 보이는 빠이러 산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하얼빈 일대가 바로 왕대의 고향인 것이다. 하얼빈에서 태어난 왕대가 멀고 먼 아버지 고향 백두산 행 여정에 올랐듯, 지금 호림원에 잡혀있는 300여 마리 후손들 역시 모두가 선대 왕대가 시도했던 백두산 행을 노리고 있다고 봐야한다. 백두산 쪽만을 응시함은 바로 그래서이리라.
지금 만주 동북 3성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의 수효는 220만에 이른다. 발해의 수도 동경성(東京城)도 하얼빈 지척이다. 조선족 220만 모두가 내게 왕대로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김승웅
한국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swkim4311@naver.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