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회의로 얻은 결실

2005-09-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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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아들이 귀가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집을 떠난 지 17년 만이었다. 중간에 두세 차례 직장을 옮기기 위하여 잠시 머문 것을 빼고는 스스로 집으로 들어 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의 귀가는 지난번의 가족회의가 결정적 영향을 준 것 같다.
아내와 내가 보스턴에 사는 큰 딸네 집에서 가족회의를 가진 것은 5월 중순이었다. 참석자는 오리지널 가족인 우리 내외와 큰딸, 아들 그리고 막내인 둘째딸에다 옵서버인 큰사위, 이렇게 여섯이었다. 큰딸과 아들은 그 곳에 살고 있었지만 막내딸은 주말을 이용해 뉴욕에서 왔다.
가족회의는 아이들이 학업과 직장 때문에 하나씩 흩어진 이후 이번이 두번째로 첫 번은 5년 전 LA에서 가졌었다. 이번 가족회의는 아이들의 우애와 단합을 다지기 위한 것 등 몇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었다.
나는 옛날의 즐거웠던 추억을 서두로 말을 꺼냈다가 잠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이 세상에서 너희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세월은 이제 10년 정도로 어쩌면 그 안에 죽을 수도 있다. 엄마는 몇년 더 살지 모르지만 여하튼 우리에게는 그 정도의 기간밖에 남아있지 않다.”
지난 첫 번째 회의에서 죽음은 삶의 연장이며 따라서 부모가 죽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너희는 끝까지 사이 좋게 지낼 것을 말해 주었는데도 아이들은 놀란 듯 일제히 나를 주목하였다.
“요새는 수명이 늘어 오래 산다지만 너희들은 아빠, 엄마가 지금 몇 살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이들은 얼른 속으로 나이를 헤아리는 눈치였고 항상 젊은 줄 알았던 부모, 그리고 늘 열심히 살고 있는 부모가 어느덧 그런 나이가 되었음을 새삼 느꼈는지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끄덕였다.
“1년에 두 번을 만난다고 쳐도 앞으로 20번 가량밖에 만나지 못하겠구나. 그러니 앞으로 우리는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하게 살다 헤어져야 하지 않겠니? 너(아들)는 썩 대단한 직장도 아니니까 좀 자유스럽지는 못해도 집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니? 그 정도 직장은 LA에서도 구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래 동안 독립생활을 해 온 녀석이 따라 줄 것인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보름쯤 뒤 직장에 사표를 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왔다.
우리가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데는 타지에서의 고생을 마감하고 함께 살려는 뜻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장차 결혼을 시키려는 계략도 숨어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대책없이 몇 년 있으면 결혼은 점차 힘들어지고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아예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날로 커져갔다.
큰딸도 35살이 되어서 겨우 결혼하더니 나머지 두 놈은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결혼할 꿈도 안 꾸고 심지어 막내딸은 아예 독신으로 살겠다고 하니 말이다. 아이들 말대로 자기들 인생이니 결혼하든 혼자 살든 자신들이 결정할 문제지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부모들 본심이 어찌 그와 같을 수 있겠는가.
자녀들의 결혼문제로 골치를 앓는 가정이 비단 우리 집만이 아닌 것 같다.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20대 자녀를 둔 부모는 저리 가라할 정도로 주위에 나이 배기 아들, 딸들이 부지기수이다. 거기다가 이혼율 마저 높아 제법 괜찮은 이혼남녀까지 가세하고 있어 이제 결혼은 각 가정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이 선택과목이며 그나마 점점 만혼에다가 이혼은 보편화하고 더구나 자녀를 겨우 하나만 두겠다고 하니 전통적 패턴의 결혼과 가정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의식구조뿐만 아니라 가치관마저 사뭇 달라지고 있으니 이런 세태 속을 어떻게 살아가며 어떤 것이 옳은지 판별하기가 매우 복잡해진다.
외부의 격랑으로부터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좀 더 가족회의를 자주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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