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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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없는 대기자들

2005-09-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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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손짓하는 비가 또 내린다. 가로수들이 축 늘어뜨렸던 어깨를 펴고 잠잠히 비를 맞고 서 있다. 우체부의 배달 없이도 가을편지를 받았는지 그새 노릇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파리도 보인다.
가장 신속, 정확한 계절의 뉴스를 전해 주는 최고의 앵커는 역시 자연의 초목들이 아닌가 싶다. 그 옆을 계절의 오고 감에 관계없는 문명의 이기가 빗속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다. 소리 없이 오고 가면서도 제 몫 다하는 자연에 비해 우리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는 얼마나 생색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계절을 바꾸기 위한 비가 이렇게 소리 없이 내리는 날 마음속까지 젖어 들도록 우리들도 비 흠뻑 맞아볼 일이다.
그러면서 배워볼 일이다. 인생의 겸허함을…
어제 퇴근후 화장대 위에 놓인 편지를 뜯었다. 모 단체장으로부터 단체 소식과 함께 회원 가족의 사망에 대한 ‘급보’를 알려온 내용이었다. 그 회원의 나이로 보아 부군 역시 아직은 세상 떠날 나이가 아닌 듯 싶은데 역시 가는데는 순서가 없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건 분명 젊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종종 내 주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면 형언키 어려운 착잡한 심경이 된다. 가장 가깝게는 내 아버지의 죽음이 그랬고 이웃의 할머니, 친척의 죽음, 아는 이들의 죽음이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점점 내 가까이 에도 저 인생 끝으로부터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이 두렵진 않다. 내가 죽는다면 내 영혼이 하늘나라에 서 예수님과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니. 그러나 착잡한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아직 마무리는 상상도 못 하면서 살아온 내 지난 시간들, 한번밖에 기회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간들 속에서 영원한 삶을 남겨 놓은 듯 미루었던 사랑 해야될 일, 용서 해야될 일, 위로해야 될 일, 나누어야될 일 등등이 그대로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다른 이들의 죽음 앞에 서 보아야 한다.
간 밤 컴퓨터 앞에서 두 아이가 다툰다. 나와 남편도 며칠 전 다툰 일로 냉기가 돈다. 개인과 개인이 대립해 있고, 노사가 대립해 있고, 여야가 대립해 있고, 나라와 나라가 대립해 있다. 이 모두가 ‘끝’일지도 모르는 내일을 ‘시작’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만일 나에게 내일 죽음이 선고되어 있다면 그 누가 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만일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죽음 앞에 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건 시간을 알려주는 괘종시계와도 같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고 때론 미래를 볼 수 있는 투시안도 갖게 되어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시간 속에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인의 죽음 앞에 우리는 숙연해지고 엄숙해져서 마음을 숙이게 되는 것이다. 고인의 명복과 남겨진 가족에게 위로를 보낸다. 우리가 순서도 없이 서 있는 줄이 또 한 칸 앞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 문을 향하여.


전현자/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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