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가너‘ 와 ‘광주’
2005-09-01 (목)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가 비누거품 뒤집어 쓴 채 발버둥치는 바르톨로를 꽁꽁 묶는 동안, 알마비바와 로지나는 사랑 놀음에 빠졌고, 난 동네아낙이 되어 그들 옆에서 놀란 얼굴로 이를 구경했다. 텅 빈 무대를 가로지르는 두 아낙 중의 하나가 되어 스포트라이트(?)까지 받았으니, 3년 차 신시내티 오페라 엑스트라로서는 대 만족이었다.
노래는커녕 노래하는 흉내도 내지 못하면서 주차비만 받고 한달 동안 거의 매일 저녁 3-4시간씩 투자하는 그 일을 위해 수백 명과 경쟁했던 것은, 세계 소프라노 가수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루츠 앤 스완슨의 ‘방금 들린 그 음성은’과 체코의 바리톤 다리볼 제니스의 ‘피가로, 피가로’등을 매일 코앞에서 들으면서 황홀지경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금년엔 우연한 계기를 통해 오페라 후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전세계의 관심속에 디트로이트에서 세계 초연된 ‘마가렛 가너‘의 신시내티 7월 초연을 도왔다. 미시간, 신시내티, 필라델피아 오페라가 협연한 이 작품은 1856년의 실화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리 모리슨이 소설화한 ‘사랑받이’를 기초했다. 도망가다 잡힌 흑인노예가 어린 두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죽인 후 처형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오페라 이사회와 후원회는 일년 이상 모금파티, 작품설명회, 현장방문, 아리아 콘서트 등 수많은 행사를 하면서 이 새 작품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야기가 그런 만큼 흑인사회에도 파고 들어갔다. 노예해방의 역사를 알리고, 오페라가 상류사회에만 속한 것이 아님을 알리고자 했다.
조상들의 억울한 과거가 상류 예술를 통해 구체화, 현장화되어 보여지는 사실은 당연히 미 전역 흑인사회에 큰 의미가 있다. 신시내티 흑인들에겐 더욱 그랬다. 그 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남부노예들이 북 캔터키와 접근한 이곳을 통해 자유인이 된 연유로, 1년전 흑인노예해방을 상징하는 ‘지하철도’의 국립자유센터가 이곳에 세워지기도 했다.
지방 유지급 흑인들은 주·조연급 가수들의 스폰서가 되고, 티켓을 살 수 없는 빈곤층 흑인들과 타주의 친지들을 초청했다. 이들과 어울려 함께 활동하던 나는 어느 날부터 씁쓸한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 상류층 백인들인 이사회와 후원회가 흑인들을 대상으로 노예의 아픔과 해방의 기쁨을 설명하는 것이, 또 빈곤층이 대다수인 흑인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 비싼 오페라 구경을 권장하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보여지지가 않았다.
마가렛이 다니던 교회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녀의 주인이었던 게인스의 자손들이 관광객을 안내하면서, 그녀가 주인과의 불륜한 관계로 신 앞에서 죄책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라 설명했다. 스스로 겁탈의 산물이기도 했던 그녀가 결혼 후 부엌으로 불려 들어가 살면서 유부남 주인에게 규칙적으로 겁탈 당했건만,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라니...
흑인 그룹이 왔을 땐 그 얘기를 쏙 빼더라는 한 흑인 참석자의 표정을 보며, 아직도 백인과 흑인 사이에 놓인 먼 거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오페라는 대개 동화 수준으로 가공된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거기에 음악, 무대장치, 연기가 더해지면서 관객들은 경지 높은 감동을 맛본다. 그러나 ‘마가렛 …’은 실재했던 뼈아픈 얘기에 예술을 가미하여 감동을 찾도록 만들어진 작품이다. 흑백간의 뿌리깊은 사회문제로 남아 아직도 흑인들이 당시 못지 않게 아파하고 울분에 떠는 고통을 예술화한 것이다.
공연 후 그 고통을 고도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믿고 자랑스러워하면서 힘차게 박수 치는, 객석 채운 백인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불공평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예술은 실재한 고통을 얼마만큼 승화시킬 수 있는 걸까? 이 작품도 백인상류층을 위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전유물은 아닐까 싶었다.
화려하다고 소문난 오페라 모금파티에 참석하여 샴페인과 식사를 즐겼던 500여명의 백인들 중 과연 몇명이 마가렛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티켓을 살 수 없었던 흑인들이 그것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광주사건’ 혹은 ‘정신대’ 이야기가 오페라로 만들어지고, 일류 디자이너의 옷으로 성장한 정·재계 한국 인사들이 모금파티를 멋있게 마친 후 국립극장에서 열렬하게 박수치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은, 역사를 역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술을 예술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옹졸함 때문인가 보다.
김보경
북 켄터키 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