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아버지’란 호칭

2005-08-27 (토)
크게 작게
이제까지 사는 동안 ‘할아버지’란 말은 나와 관계가 없는 말로 여겼었다.
나는 유복자이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는 아버님조차 이 세상에 안 계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더더욱 상상이 안되었다. 물론 명절이나 기제사가 돌아오면 고조, 증조,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그런 대화가 오고 가곤 했지만 할아버지는 늘 추상적인 조상에 불과 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얼마 전 누님의 큰아들 부부가 한국에서 이곳 캘리포니아로 근무지를 바꿨다. 그 조카의 아이들이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처음에 한두 번은 귀에 설더니 이내 편안해졌다.
한국에서 떠날 때 큰 누님이 아직 취학 전인 꼬마들에게 단단히 일러준 게 분명하다. 그 애들과 몇 번 어울리다 보니 이젠 내가 오히려 나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피붙이 어린애들이다. 살도 보드랍고 눈망울도 초롱초롱하다. 손톱은 핑크 빛이다. 머릿결은 고운 흑단이다. 말은 또 얼마나 귀여운가. 먹는 것과 자는 것, 모두가 예쁘고 예쁘다.
그 애들에 비하면 내 살결은 어떤가, 내 눈은 ‘눈망울’로 불러도 되는가. 내 손톱과 내 머릿결은... 내 말투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시들어, 생기 없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50년 이상을 견디어 오면서 겉모습은 바래고, 변하고, 거칠어지고, 게다가 속은 얼마나 순수를 잃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내가 정말 할아버지 소릴 들을 자격이 있나 싶어지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엄마 아빠와 비교할 수도 없고, 게다가 인자하기까지 하며 때론 저희들 편을 들어 엄마 아빠도 야단칠 수 있는 존재이다.
난 아직 그런 할아버지가 되지는 못한 듯 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하여 무엇하나 거칠 것 없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기엔 아직 너무 많은 세상의 때가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연을 생각하게 된다. 봄의 새 잎에서만 생명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가을의 낙엽은 보잘 것 없고 시들어만 가는 것인가. 아니다. 가을의 자연은 봄 못지 않게 아름다울뿐더러 충만하고 중후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그 가을의 자연은 공부하고 노력해서 그토록 아름답고, 충만하고 중후해진 것인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냥 거기에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 내가 진정한 할아버지가 되려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그냥 있으면 된다. 지금껏 자연스럽게 살아오지 못해 말 그대로의 할아버지가 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자연스러워야 겠구나.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나도 조금은 가을의 자연처럼 아름답고, 충만하고, 중후하고, 깊고, 높고, 넓은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이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목여향/L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