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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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양심

2005-08-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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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이란 소설을 읽은 지 10여년인데도 그 때의 감동이 아직 어제처럼 기억난다. 그때 서울을 방문중이던 나는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남아 강남의 어느 샤핑몰 앞 광장의 라일락 밑 벤치에 앉아 전날 산 이 책을 읽었다. 주위에는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었지만 책을 다 읽고 접는 내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강남의 인파도 라일락 향기의 유혹도 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 책을 읽은 이면 누구나 독일인의 낭만, 영혼 등에 대해 한번쯤은 동경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책을 써서 모국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전세계 독자들의 가슴에 불멸의 화살처럼 꽂은 저자 막스 뮐러를 가진 독일이 한없이 부러웠다.
우리도 타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한국인의 양심’이란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이 나를 슬프게 한다. 한국에서 소위 ‘X 파일’사건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정·경·언 유착 스캔들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거물 인사가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대통령 후보에게 국내 최고의 재벌을 대신해 수십 억의 불법 선거자금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돈더미를 쥔 자들의 무소불위한 언행, 정권교체 때마다 줄지어 나도는 부정부패의 뒷 이야기의 바탕에 자리잡은 한국사회의 금권 만능주의,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내 배만 채우자고 눈앞의 욕심에 눈먼 떡값, 차 떼기의 행렬…
양심도 명예도 원칙도 애국심도 심지어는 최소한의 상식도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고 한 나라의 대권을 꿈꿀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공공연히 넘볼 수 있을까.
이 사건의 추이를 읽고 한국의 미래에 대해, 한국인의 양심에 대해, 한국사회의 의식구조에 대해 뼈저린 절망감을 느끼지 않은 한국인이 있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도 이러한 황금만능주의와 무슨 수를 쓰던 내 한 몸만 잘 되면 하는 이기주의로 살고 있지 않나 되돌아 봐야 한다.
돌아보자. 올 봄 한인사회를 휩쓸었던 한인 투자회사들의 엄청난 사기행각과 한인들의 무더기 피해, 끝없이 들리는 지역 한인사회 주변의 권력다툼이나 재정비리 등의 문제도 금전이나 감투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닌가. 버젓이 잘 사는 사람들이 수입을 속여 각종 정부보조를 받고 일부 한인모임은 팔 걷고 나서서 이 일을 돕기도 한다.
많은 자영업체들은 종업원들을 최저생활도 제대로 보장해 주지 않은 채 혹독하게 부려먹고, 신선한 상품, 친절한 서비스, 정직한 가격보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에 혈안이다.
자녀 교육은 어떤가. 부모들은 돈벌이에 바빠 자녀교육을 아예 각종 학원에 맡겨 놓는다. 어릴 때부터 개성과 취미를 살려 현명하고 원만한 성격의 청소년으로 자라도록 보살펴주는 대신 부모들은 손쉽게 대입학원에 투자해서 자식들의 명문대학 입학을 따내려 한다. 명문대는 개성과 창의성, 그리고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인재들을 찾고 있는데 아이들은 학원에서 예상 답안을 배운다. 이렇게 명문대를 진학해 봐야 이름을 사는 것일 뿐 다른 인재들의 기회를 빼앗고 결국에는 우리 자식들도 저버리는 짓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많은 한인사회 청소년들이 왜 탈선이 잦은가. 왜 학벌은 좋아도 주류사회 진출이 저조하고 한인사회에서 맴도는가. 이런 슬픈 결과가 바로 수박 겉 핥기식 교육방법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자녀교육 때문에 미국에 왔다는 부모들이 그 입시지옥을 미국까지 끌고 온 자업자득인 셈이다.
명문대, 명품 등 유명한 이름을 걸친다고 하룻밤에 지식인이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될까. 진실로 성공한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게 아니다. 제 힘으로 열심히 일하고 벌어서 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들이 성공한 이야기엔 지름길이 없다. 이런 이야기에 ‘한국인의 양심’이 자랑스러운 주제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공한 민족이 될 것이다.

박정현
IT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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