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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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진

2005-08-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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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펭귄들의 행진’(March of the penguins)은 많은 것을 알게 하는 영화이다. 펭귄이 동물인지 바다새인지, 걸어다니는지 날아다니는지, 헤엄을 치는지, 새끼를 낳는지 알을 낳는지… 등을 생생하게 알려 준다. 카메라가 그들을 쫓아다니면서 기록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맨들이 무거운 장비를 메고 일년이 넘게 펭귄을 따라다닌 결과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 기록영화를 감상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펭귄들의 삶은 단조로우면서도 목표가 뚜렷하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3개월 동안 70마일의 거리를 무리 지어 행진하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몸을 곧게 세우고 뒤뚱뒤뚱 걷다가 때로는 엎드려 얼음 위를 미끄럼 타기도 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행진한다. 그 큰 무리는 왜,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 영화가 차근차근 설명한다.
특히 큰 감명을 느끼는 대목은 부모가 새끼 양육의 일을 서로 분담하여서 책임을 지는 점이다. 또 새끼가 자립하게 되면 미련 없이 그들의 곁을 떠난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텐데…. 하여튼 뒤가 깨끗하다.
여기서 잊고 있던 어느 부자간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무 고맙게 대하니까 그는 덜컥 겁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저는 아무래도 이 은혜를 갚지 못할 것 같으니까 더 이상…”이라고 말하였고, 그 아버지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 본능이고 기쁨이다. 그러니까 너는 갚으려고 하지 말고, 몽땅 받기만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자녀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다. 펭귄 부모들도 비슷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도 쉼 없이 행진을 하고 있다. 바로 삶의 행진이다. 펭귄들처럼 단조로운 목적을 위한 행진이 아니고,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각자의 속력대로 행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양한 목적이란 형태만 다르지 본질적으로 같은 것 같다. 그것은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때때로 기대해도 좋은 것과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소위 선하다는 일을 하고는 무엇인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자녀에게 쏟은 애정을 생각하고는 그들이 부모에게 잘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당연히 부모를 섬겨야 하지만 결코 바랄 일은 아니다.
무엇인가 바란다는 것은 자칫하면 원망하거나 실망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호의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허무를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내 영역 밖의 일 때문에 내 자신의 줏대를 잃을 수는 없다. 이런 현상이 공적인 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요즈음은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미국 정부의 고관이 된다든지, 시 정부의 행정관이 된다든지, 마을의 경관이 된다든지, 학교의 교사들이 허다하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 마음이 든든하다. 왜 그런가. 은연중 무엇을 기대하는가.
말할 것 없이 그들은 공복이다. 사회를 위해 공평하게 봉사할 큰 책임을 지고 있다. 거기에 특혜를 받게 되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피부색이 같으니까, 같은 고국을 가지고 있으니까라는 생각은 당치도 않다. 이런 일이 기대해서 안 될 일에 속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다 같이 삶의 행진 중이다. 도중에 쓰러지거나 병들면 서로 도울 수 있다. 방향감각을 잃었을 때 서로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대하던 일을 성취 못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서로 격려하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래서 공동생활의 뜻이 있고 묘미가 있다. 그런데 더 흥미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기대할 수 있는 일, 기대하면 안 되는 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대하지 않은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생각이 있다면 어디서나 아무나 할 수 있다. 또 그 결과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새끼들이 자립할 때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쏟고 그들의 곁을 떠나는 펭귄들을 보면서 갖가지 상념이 오락가락 한다.

허병렬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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