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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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린 어머니

2005-07-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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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큰 키에 짧은 수염, 색안경 쓴 중년의 쪽진 서양남자를 보며 여든 해 이상을 매일매일 곱게 쪽 지시던 백세의 치매 걸린 어머니 생각한다.
딸인지 당신의 어머닌지 날마다 달리 보시는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의 딸도 되고 늙은 아기의 엄마도 되는 헷갈리는 내 배역이다. 딸 역만 우기다 지쳐 그럭저럭 서너 배역을 번갈아 가며 함께 간다.
철 맞춰 동정, 버선 고운 손질로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을 초지 일관 하셨던 한 세기의 정갈한 긴 삶은 어느 곳에 띄우시고 분비대 달랑 찬 옹크려진 아가 되어 세월을 거꾸로 파시며 날마다 나를 맞으시나. 치매 걸린 불쌍한 나의 어머니.
늙으신 몸 무릎꿇고 조용히 기도하시던 그 모습이 당신 방 푸른 벽을 배경으로 내 눈에 어른거리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느끼시는 지나 모르겠다.
어릴 때 친척집 경조사에 다녀오시는 어머니의 빈손을 보고 실망하던 나에게 부모님 공경하는 음식은 들고 다녀도 자식 먹으라고 싸들고 다니지는 않는 거라던 어머니. 가난 속에서도 그 기품 지키심이 무척 야속했는데 지금은 조금 나를 알아보실 땐 “배가 홀쭉하구나. 밥해놨다. 밥 먹어라”며 뚱뚱한 나에게 그 걱정만 하신다.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뭐하냐고 쉬지 않고 움직이시던 부지런함으로 구십을 넘기시고도 김치를 손수 담그시고 말린 옷을 다린 것 같이 반듯하게 개키셨는데 지금은 남의 손에 당신 몸 보이심이 무의식 속에서도 수치를 느끼시나 돕는 손길들을 거부하고 계신다. 때리고 역정 내시는 손짓으로.
보약 한번 안 드시고 건강상식 전혀 모른 체 당신 몸 안 살피고 부지런히 일만 하셔선가 여태 건강 하셨고 장수하심이 치매만 없으셨으면 정말 깨끗하셨을 텐데 어머니는 당신의 이런 모습 상상도 못하셨을 텐데.
겉만 안 상하면 된다. 속상하는 거야 보이니? 한숨, 눈물 안 보이며 꿋꿋하게 사신 어머니. 긴 여정 속에 보이지 않았던 아픔들이 마음에 안 드셨나? 눈뜨고 꿈꾸시며 하나하나 지워 가는 작업을 하시나 보다. 천국엔 전쟁, 이별, 아픔, 가난 없는 하얀 백지의 아기 모습으로 가시려고.


박은옥 할리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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