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여인과의 춤
2005-07-06 (수)
87년 사회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겨울을 생각한다. 밤늦게 체코 당국이 지정하는 호텔에 여장을 푼 후 아래층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봄직한 야회복 차림의 귀부인들이 무도장 복도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더 놀란 건 귀부인 모두가 하나같이 젊고 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와 야회복이라! 어딘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여인들의 출중한 미모에 감탄했다. 동유럽에 슬슬 개방의 물결이 일면서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앞치마를 두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 여인에게 춤을 권했다. 플로어에 끌려나오며 부끄러워하던 여인의 뺨이 어두운 조명 밑에서도 역연했다. 그녀의 부끄러움이 나를 왈칵 슬프게 했다. 이름을 마리아라 했다. 당의 지시를 받고 나온 여염집 여인이었다. 발발 떨며 스텝을 밟던 마리아와의 춤은 내가 사회주의 여인과 춰 본 최초의 춤이다. 무도장의 커튼 밖으로 겨울의 블타바(몰다우) 강이 프라하 시내 복판을 검게 흐르고 있었다.
그 후 워싱턴에서 미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등장을 지켜보며 나는 10년 전의 블타바 강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동구여성 특유의, 클린턴 말마따나 `엄마 닮은 그녀의 눈매’를 대하는 순간 까마득히 잊었던 마리아가 떠올랐다. 이어 환각에 빠졌다. 부끄럼 투성이의 마리아가 언제 저토록 당당한 여걸로 바뀐 걸까. 한 나라의 변화가 강처럼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도 유속을 늦추지 않던 블타바 강처럼.
올브라이트는 어린 시절 바로 그 블타바 강변을 달리던 소녀다. 열 세 살의 나이로 아버지 따라 체코를 떠나 미국 이민을 시작한 유대계 체코인이다. 자신의 미국 이민사를 “처음엔 히틀러한테, 두 번째는 스탈린한테 쫓겼기 때문”이라고 조국 체코의 역사 속에 담을 줄 아는 여걸이다. 그런가 하면 슬하의 세 딸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보호만 받지 말고 너희 어머니가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볼 분별의 나이”라고 강조하는 당찬 어머니이기도 했다.
얼핏 우리 얘기 같지 않은가. 똑똑하고 당차기 그지없이 키운 바로 나의 누이, 나의 딸 얘기 같지 않은가. 특히 이민 경위가 우리 재미동포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미 국무부는 지금도 매일 낮 정오에 정례 기자회견(눈 브리핑)을 치른다. 이 자리에는 매년 미 국무부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20여 명의 남녀 신참 외교관들도 한 차례 모습을 나타낸다. 그 때마다 나는 노루목을 지키는 사냥꾼의 눈이 되어 동양계 신참 외교관들을 주시한다. 저 중에 분명히 한국계도 끼어 있으리라 혼자 다짐해 왔다.
박 세리나 미셀 위의 명성을 접할 때도 나는 마찬가지다. 미 골프계를 저 정도로 지배했거늘, 국무부의 장악 역시 시간문제라 여긴다. 미국 이민 간 친구들을 만나면 불만도 터뜨린다. 아들딸을 왜 툭하면 변호사나 의사만 시키려 드느냐, 제발 국무부에 보내라고 간청한다. 초대 한국계 국무장관이 배출될 경우, 아니, 차선으로 주한 미 대사만 나와도, 주한 미군 10개 사단에 맞먹는 역할을 할 것이라 장담해 왔다.
체코를 EC(유럽공동체)에 가입시켜 국력을 배가시킨 배후인물은 다름 아닌 올브라이트였다. 또 위틀리 편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는 러시아 한국이민 3세다. 그 나라 대외 교역량의 60%를 한국이 차지하도록 조종했고, 최근 두 나라 정상 회담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와 점심을 나누며 대사가 남겼던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고)저를 한국인으로 보시면 오햅니다. 내 조국 우즈베키스탄을 위해 일 할 뿐입니다” 얼마나 당당한가. 당연히 그래야 옳다.
반드시 미 국무부만을 겨냥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최근 미 법무부 민권담당 차관보에 재미교포 2세 완 J 킴이 지명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글을 쓴다.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NCD) 정책차관보 강영우박사, 또 노동부 여성국장(차관보) 전신애씨에 이어 부시 행정부 들어서 세 번째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들로부터 뭘 대놓고 기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위기를 대비해 이들을 믿고 맡길 뿐이다.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가나안 잔치의 포도주 기적처럼,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에 아들도 결국 굴복하지 않던가. 재외동포 모두에게 대한민국은 어머니다.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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