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류의 힘

2005-06-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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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언젠가 도쿄에 갔을 때 한 일본인 친구에게 배용준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노스웨스트 항공의 직원으로 일하다 이제는 살림만 하는 50대 초반의 아줌마인 그녀는 갑자기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자기는 욘사마의 팬이라고 고백했다.
다음에 도쿄에 오면 꼭 자기들 집에서 묵으라는 그녀 부부의 초청에 응해 몇달 후 그들 집에 가니 침실 벽에 배용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난생 처음 배우 포스터 밑에서 잠을 자고 난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배용준이 왜 좋으냐고 물어봤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그의 배경에 후광이 있다”고 밖에 설명을 못하겠단다. “근데 그 후광이 왜 내 눈엔 안보이지?” 했더니 그녀는 폭소를 터뜨린다.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울연가 20편중 마지막 4편을 봐야했다. 마지막 편만 보여 달라니까 그래도 몇편은 봐야 한다며 17회부터 틀어주었다.
그녀는 전에는 한번도 연예인의 포스터 또는 관련 잡지를 산 적이 없었다는데, 배용준의 매력에 폭 빠져든 자신에 스스로도 놀랍다고 했다. 겨울연가를 함께 보며 그녀는 자제하는 사랑, 순수한 사랑 같은 것을 요즈음 일본 텔리비전에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쉽게 사랑하고, 헤어지고, 남자들은 하나 같이 나약하고 그런 것에서 자기는 어떠한 공감이나 매력을 못 느껴 텔리비전을 별로 보지도 않았었는데 겨울연가는 배경 음악이나 경치, 주인공, 스토리 모두 가슴에 와 닿는단다.
겨울연가로 인해 한국 배우들과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면서 얼마나 열심히 한국 연속극들을 빌려다 보는지, 그녀는 이제 연속극 대사와 삽입곡의 노래 가사들을 한국말로 줄줄 외우는데 발음이 제법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기 위해 책도 열심히 본다. 그간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아 부끄럽다고도 했다.
왜 일본은 이웃나라 한국에 대해 그토록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그건 죄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들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하고 치유의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을 일본인들은 거치지 않았고, 고로 ‘한국’이라면 가슴 한구석에 찔리는 게 있는 그 무엇으로 남아 그 얘긴 꺼내지도 말고 멀찌감치 두고 살자는 것이 그간의 일본 지도층의 자세가 아니었을지.
그런데 어떻게 일본에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가? 그건 정치와 상관없는 시장원리에 의해 한국의 드라마가 일본에 새로운 볼거리의 하나로 수출되었고, 일본 지도층의 그러한 자세에 의해 한국에 대해 거의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 아주 순수하게 드라마에 공감하며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한국 드라마의 제작 수준이 일본에 뒤질 것 없는 데다가 스토리는 오히려 중년 여성들 입맛에 딱 맞는 것이어서 오늘날 일본의 사랑문화에 이질감을 느끼던 아줌마들이 아이고 반갑다 하게 되었고, 그를 계기로 한국의 다른 드라마와 배우와 노래와 가수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에 대해 알려는 욕구도 자연스레 생겼다는 얘기다.
이는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때 한국인과 일본인은 얼마든지 넓은 공감대를 가진 이웃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독도 문제와 같은 정치적 문제일수록 감정을 빼고 아주 이성적으로 다루면서 양국의 일반인들이 서로 친구 사이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아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신대 문제 등 모든 과거사 청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 일반적 여론이 형성되어져야만 일본의 지도층들이 달라질 것 이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아야 중국과 힘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다는 한 일본인 친구의 말을 곰씹으며 한일 교류의 물꼬를 터준 한국의 드라마 제작진에 박수를 보낸다.


김유경
camp www.co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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