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던 시절
2005-06-07 (화)
대한항공 김포공항 지점에 색다른 전문이 날아든다. “국적:중화인민공화국, 성명:Alec Cheung, 생년월일: 47년 4월x일, 도착편:금일 KE 001, 귀 지점의 선처 요망.”
전문의 발신지는 대한항공 하와이 지점. 전문을 쥔 대한항공 공항지점장이 아연실색한다. 처음 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본다. 이제 정확히 한 시간 후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중공인의 서울 입국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74년 연말의 일로 나는 당시 한국일보 사회부 소속으로 김포 국제공항의 출입기자였다. 대한항공 지점장이 공항 법무부 출입국 관리 소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던 장면이 내 눈에 잡혔다. 음, 뭔가 있다!… 연말을 맞아 가뜩이나 특종에 굶주렸던 기자의 수성(獸性)이 꿈틀댔다. 출입국 관리소장을 반시간 남짓 어르고 달랜 끝에 “오늘 밤 8시 비행기를 지켜봐” 소리를 얻어냈다. 한 마디로 대어(大魚)다. 본사에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판 1면 자리를 비워놓으라고 으스댔다.
‘중공인 최초로 서울에 오다!’ 다음 날 한국일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기자 시절의 무용담을 늘어놓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 반대다. 지금처럼 기자수첩을 꺼내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매번 참담한 심정이 든다.
정확한 상황은 이렇다. 중국인 장입군(당시 28세)씨. 캐나다에 사는 같은 중국계 약혼녀 루이스 콴 양과 함께 하와이 관광 후 서울에 일시 기착. 다음 날 홍콩 경유 북경으로 가려던 예정. 김포공항은 그날 밤 장씨에게 임시상륙 허가증을 발급, 다음 날 홍콩행 여객기에 오를 때까지 하룻밤을 머물도록 허용했을 뿐이다.
임시상륙 허가란 여행객이 항공기나 선박의 조난 또는 재해로 여권을 분실했을 경우 상륙지 정부가 발급해 주는 임시 통행증이다. 장씨의 경우 여권 분실의 형식으로 상륙 허가가 난 것이다.
이 ‘최초의 중공인’이 알고 보니 약혼녀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에 영주하고 있는 화교로 캐나다 국적도 함께 가지고 있던 이중국적자였다는 사실도 나를 참담케 한다. 중공 여권대신 집에 놓아둔 캐나다 여권만 가져왔던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사안이 당시 이중국적을 금기로 알고 있던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항공 직원, 그리고 특종에 목말랐던 기자에게 문제가 됐던 것이다.
파리 특파원 시절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다. 이웃 나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행사 취재를 위해 파리 공항을 떠나는데 아차, 여권을 안 가지고 나온 것이다. 집에 다시 들를 시간은 없고 할 수 없이 파리 공항 직원에게 사정했더니 그는 두말 않고 독일행 여객기에 태워줬다. 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사정을 말하라며 임시상륙 허가증이 발급될 터이고 그 벌금이 고작 2마르크 정도가 될 것이라는 귀띔까지 잊지 않으며.
이중국적에 관한한 30년전의 그 당시가 지금껏 그대로 계속된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OECD)에 끼어 있다. 이 30개 OECD 국가 중 이중국적을 허용치 않는 국가는 유일하게 한국뿐이다. 또 국제법 어느 항목을 봐도 이중국적을 금한다는 대목은 없다. 국제법은 다른 법과는 달리 관습을 법원(Origin of Law)으로 삼는 법이다. 잘사는 나라 모두가 허용한다면 이중국적은 이미 국제법화 됐다고 봐야 한다.
OECD에 끼지 못하는 중국은 어떤가. 지금 해외화교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상의 이중국적 소유자다. 이 화교를 지금의 거대한 공룡자본 화상(華商)으로 바꾼 것은 두 명의 실용주의 지도자, 중국의 등소평과 싱가포르 이광요다. 두 지도자가 사실상의 이중국적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매년 중국에 쏟아 붓는 돈은 중국 전체 외자투자 규모의 60%다. 이 화상을 벤치마킹해서 만들어진 것이 한국의 한상(韓商)이라면 한상에게도 화상들에 맞먹는 사실상의 이중국적이 허용돼야 옳다.
정작 참담한 이유가 또 있다. 공항 기사로 나는 그해 한국일보가 주는 특종 금상을 탔다. 상대지 기자는 낙종으로 출입처가 바뀌었다. 특종 아닌 특종을 놓고 집착했던 그 시절을, 또 특종이라는 미명하에 공공연히 자행됐던 그 당시 나의 천박함을 나는 두고두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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