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내의 동창 여행

2005-05-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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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동창회 하나쯤은 있는데 아내의 동창회는 퍽 요란스럽다. 대학시절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해서 남달리 정이 든 탓이란다. 밴쿠버에 이어 서울, 시카고 그리고 이번에는 미네소타로 간다.
그들은 친구 남편들 이력까지도 줄줄이 외는 어깨동무 단짝들이다. 역마살 증후군이 별난 동아리 단합대회를 여는지 열렬 극성이다. 이름 끝자에 ‘자’자가 든 사람들이 만든 자칭 ‘자야 골프 클럽’도 있다.
나는 간다간다 하면서 끝내 못가고, 못간다고 하는 아내는 잘도 가기만 한다. 갔다 오면 아내의 수다 또한 여고시절 수준이 된다. 웃음 보따리도 풀어놓고, 거기서 배운 살사 춤을 춘다고 신이 나서 왔다갔다 정신까지 빼놓는다.
대부분의 모임이 뒤끝이 씁쓰름하기 일쑤인데 이 동창회는 뒷맛이 환상적이다. 밤새껏 정담을 나누고도 헤어지기 싫어 얼싸안고 눈물까지 흘리고 온단다.
아내는 떠나기 전날 밤, 쌀 씻어 찹쌀, 좁쌀, 콩, 녹두 넣어 물까지 알맞게 부어 놓았으니 전기 밥솥만 누르란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서야 솥을 열어 보니 씻어 놓은 쌀에서 쉰내가 났다. 아내의 정성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저녁 늦게 근처 식당에서 하루 한끼 비빔밥을 먹고 있는데, 뉴욕에 사는 아들 내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불쌍하단다. 하지만 이 말에는 유효기간이 있어 다행이다.
잠시 아내가 없으면 홀가분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내의 소중함을 각인시켜 주는 금식의 순간들이었다. LA 공항에서 아내는 내 손을 꼭 쥐며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결국 인생은 나그네, 세상은 여관이라는데 직장을 핑계로 시계추의 관성에 익숙해진 자신의 옹졸한 집착이 부끄럽다.
이제 석양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그리고 살사보다 더 진한 여행을 아내와 함께 멀리 떠나고 싶다.

고영주
한국어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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