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잘 익은 포도로 만들면

2005-05-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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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알콜 함량과 맛

가주산 보통 14~15%
프랑스산 평균 12.5%

나파 밸리의 ‘베린저 블라스 와인 에스테이트’(Beringer Blass Wine Estate)가 이달 초 여성을 위한 저 알콜 백포도주 ‘화이트 라이’(White Lie)를 선보였다.
화이트 라이의 알콜 함량은 9.8%로, 보통 샤도네가 13~14%인데 비해 현저하게 낮으며, 흔히 버터 맛과 오크 향이 진한 나파산 샤도네와는 달리 가벼운 맛이라고 한다. 가격은 10달러 이하.
베린저 블라스 와이너리는 알콜 함량을 낮추기 위해 포도가 다 익기 전 당분이 많지 않을 때 수확하고(포도의 당분이 발효되면서 알콜로 변한다), 양조과정에서 기술적인 방법으로 알콜 함량을 조금 더 줄였다고 밝혔다. 보통 와인메이커들이 포도가 충분히 익어서 당도가 가장 높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확하는 것과 정 반대의 방법이다.
와인의 알콜 함량은 와인의 맛과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있을까?
와인 용어로 알콜 도수가 높은 와인을 ‘빅’(big) 와인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도수 높은 와인은 더 크고 진하게 느껴지고, 도수 낮은 와인은 좀 연하고 밋밋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섬세한 결을 가진 프랑스 와인은 알콜이 평균 12.5%인데 비해, 진하고 풍만한 캘리포니아 와인은 보통 14%를 넘어서는 것이 그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그런데 얼마전 뉴욕타임스는 그러잖아도 알콜이 많은 캘리포니아 와인들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80년대만 해도 12~13%이던 것이 요즘엔 보통 14~15%, 심지어 16~17%를 넘어가는 와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포도 품종 중에서 시라와 진판델, 아마로네 등은 높은 당분 때문에 알콜이 높은 와인을 만들어낸다. 특히 진판델의 경우 15~16%가 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은데 요즘은 이들 외에도 카버네 소비뇽과 멀로 등 대표적인 적포도주들조차 점점 도수가 높아지는 추세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알콜 함량이 높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 과거보다 당분이 많은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포도 재배자들은 당분 측정기를 사용해 포도의 당도가 일정 수치에 오르면 수확했다. 그러나 요즘은 포도알만 익는 것이 아니라 껍질과 씨까지 완전히 익기를 기다려 포도가 훨씬 달아졌을 때 수확하고 있다. 이렇게 당도 높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더 달고, 산도는 낮고, 태닌이 부드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오래 숙성하지 않아도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 된다.
뿐만 아니라 포도경작에 각종 첨단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유전공학의 도움으로 다양한 뿌리 접목을 실시, 맞춤형 포도 재배를 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맛이 이렇게 진해지고 강해지는 현상에 대해 와인업계와 전문가들은 우려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아하게 숙성돼 가야할 와인이 스테로이드를 맞은 것 같다고 비웃기도 하고, 저녁만찬에 그렇게 센 포도주가 오르면 음식 맛을 즐기기도 힘들지만 쉽게 취할 뿐더러 다음날 두통을 겪기도 하는 등 와인문화 자체가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의 회장이었던 R. 마이클 몬다비는 “와인은 식사와 함께 즐기는 음료”라고 못박고 “요즘 와인들을 보면 오래전 나의 할아버지가 크고 진한 와인에는 물을 타서 마시던 일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와인에 물을 섞는다는 몬다비 할아버지가 이상하게 여겨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와인의 맛을 부풀리기 위해 알콜 도수를 올리는 와이너리들도 많지만 반대로 알콜 함량이 너무 높을 경우 물을 섞는 일도 드물지 않다. 지난 해 10월 LA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포도에서 짜낸 포도즙을 발효시키기 전, 혹은 발효 도중 물 몇 버킷을 집어넣는 것은 캘리포니아의 거의 모든 와인메이커들이 하고 있는 관행이며 공공연한 비밀이다.
와인메이커들은 와인 만드는 도중 물을 넣으면 맛이 훨씬 부드럽고 우아해진다고 고백한다. 농익어서 수분이 줄어든 포도를 발효시키면 너무 달고 알콜 함량이 높아지는데 거기에 물을 첨가하면 훨씬 밸런스가 좋은 와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와인에 물을 섞는 일은 프랑스를 포함, 유럽의 대부분의 와인생산 국가들이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포도의 당분이 지나치게 높은 해에는 유럽의 와인메이커들도 은근슬쩍 물을 섞기도 한다고 업계는 전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발효중인 와인에 물을 섞는 일이 합법이다. 얼마나 섞는가는 와인메이커에 달려 있지만 보통 15~20% 정도를 첨가하는데 호주의 경우 3% 이상을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다.
와인의 맛은 산도, 당도, 태닌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처럼 알콜의 함량 역시 무시 못할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포도주가 발효되는 도중 물을 섞으면 훨씬 맛이 좋아진다는 샌포드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 브루노 달폰소.



베린저 블라스가 내놓은 여성용 와인 ‘화이트 라이’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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