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지막 수업의 기억

2005-05-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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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 생활에 진력이 난 환자 셋이 의사한테 탄원을 낸다. 이제 병이 다 낳았으니 제발 퇴원시켜 달라는 탄원이다. 퇴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의사가 세 환자에게 묻는다.
“둘 더하기 둘은 얼마지?”
첫 번째 환자가 자신 있게 “다섯!”이라고 대답한다. 두 번째 환자의 대답은 “수요일!” 물론 둘 다 퇴원 불가다. 세 번째 환자가 “넷!”하고 정답을 맞춘다. 이를 대견히 여긴 의사가 그 환자의 퇴원 수속을 거들며 정답게 묻는다.
“어떻게 해서 그 답을 맞혔지?”
환자의 대답은 “다섯에다 수요일을 더하면 돼요!”
숫자의 귀재라는 소리를 들어온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이따금 즐기던 조크다. 같은 4라는 숫자지만 무슨 근거, 어떤 측면으로 봐야 할지를 그린스펀은 이처럼 진한 조크를 통해 전한 것이다.
그가 자의로 올리고 내리는 미연방금리가 0.05% 높아지느냐 낮춰지느냐에 따라 미 경제가 휘청휘청한다. 덩달아 세계 경제도 휘청댄다. 왜 하필 0.05%인지는 그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불쑥 40년 전 나의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당시 누군가 내게 “대학 4년 더하기 군대 3년은?”하고 물었다면 나로서는 7년이라는 정답 대신 “달이요!”라고 대답했을지 모른다. 지구로부터 정확히 38만4,000km 떨어진 죽은 달을 나는 매력 있는 생물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직후 연세대 뒷산의 내 어설픈 성인식을 지켜봤던 아름답던 달, 그래서 심하게는 서글프기까지 했던 골드문드의 달을 나는 군대까지 다녀 와 햇수로 7년째 맞는 대학생활 중에도 내내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대학시절은 달 그 자체였다. 대학촌의 달빛이 특히 좋았다. 결코 4 더하기 3의 합산이 아니었다.
대학시절의 내 마지막 수업은 그해 여름 혜화동에 사시는 동주 이용희 박사의 서재에서 치른 ‘국제정치 연습’으로 기억한다. 교수의 마지막 언급을 지금껏 기억한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제왕학을 공부한 거야… 자중자애들 하게. 그리고 큰 인물들 되라구!”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큰 인물과는 전혀 무관한 예의 달 얘기를 꺼냈다. 달을 기하와 감성 어느 시각으로 봐야 옳을지를. 동주 선생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두 시각의 눈을 다 가지게. 그게 합리적인 거야”
여기서 굳이 40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미국서 태어나 그곳 최고의 명문 하버드 대학에 재학중인 한국계 학생 네 명이 최근 서울에 왔다. 국내 신문기자가 이 네 사람에게 졸업 후 장래 희망이 뭔지를 묻는다. 답변은 다음과 같다.
학생 A(의대): “의사가 되어 제3세계 어려운 나라에 가서 일하고 싶다”
학생 B(생물학): “공공정책에 관여하고 싶다. 많은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 C(언어학): “이중언어 교육에 관심이 많다. 영감을 주는 위대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학생 D(사회학): “법대에 진학, 국제법·인권법과 관련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위에 소개한 4명의 답변 가운데 특히 ‘영감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학생 C의 답변이 못이 되어 박혀온다. 영감이라… 얼마나 찬란한 답변인가. 영감이란 영성을 지닌 사람한테서만 기대할 수 있는 소산이다. 흔들리는 나무 잎은 누구나 보되, 정작 그 이파리를 흔드는 바람을 보는 사람은 없다. 영감을 지닌 사람은 바로 그 바람을 보는 사람이다.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 어디로 흘러가는 지를 오직 영감을 가진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또 네 사람의 답변을 찬찬히 듣다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공부하는 이유가 나 한 사람의 출세나 영달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졸업 후 제가 사는 사회에 대한 기여다. 우리와 똑같은 한국 핏줄이고, 한국계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도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 명문 대학에 다니는 이유 하나로, 저리 예쁘고 우아한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점이 신기한 것이다.
내 경우 어떤가. 그토록 따르고 닮고 싶었던 교수들이 많았건만, 나는 왜 그들로부터 그리움만 간직할 뿐 예의 하버드생 C가 얻어낸 영감을 얻어내지 못했을까. 교수들 책임일까. 아니면 나의 함량미달 때문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남을 제치고 선두를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천박한 엘리티즘 때문일까. 하버드생 C의 답변은 내겐 두고두고 숙제가 될 것 같다.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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