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던 해 6월26일 청송에서 태어난 신후식 목사. 신 목사의 백세수를 축하하는 잔치가 오늘 서울장로교회에서 성대히 열린다.
격동의 시대를 꼿꼿한 기개로 헤쳐오면서 교육자로서, 또한 목회자로서 한민족의 지표와 양심이 되어준 그의 삶을 경하하는 자리다.
그러나 신 목사는 지난 한세기 동안 자신의 삶이 “풍타낭타(風打浪打)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과 한국 동란, 4.19 혁명, 5.16 쿠데타...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현장에 늘 있었다. 민족 사랑에 앞장섰고 후학 양성에 몸을 바쳤다.
신 목사는 “나는 국적을 4개나 가졌던 기구한 사람일 뿐”이라며 인터뷰 말미에 “오랜만에 소회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줘 고맙다”고 겸손해 했다.
세 번 죽었다 살아나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일본의 한반도 강압통치도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모교인 계성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그해 10월 다른 교무원, 학생들과 함께 ‘국제 스파이’ 혐의로 헌병대에 체포됐다. 미국선교사와 친하게 지낸 것이 의심을 샀다.
‘치안 유지법 위반’ ‘군기보호법 위반’ ‘조선임시 보안법 위반’ 등 3개 혐의로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신 목사는 “거꾸로 매달고 가하는 고문 때문에 세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고 회고했다.
다음해 부산 형무소로 이감됐고 결국은 6월말 무혐의로 석방됐다.
“헌병들은 가택 수사도 하고 내 설교집도 샅샅이 조사했지만 허사였지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기는 했지만 증거가 있을 리 없었지요”
신 목사는 “감옥에 있는 동안 그 춥고 먼 길을 개의치 않고 8번이나 찾아준 아내가 고맙다”며 “얼마나 고생했겠느냐”고 안스러워했다.
대한독립 만세 ...
이보다 앞서 1929년에 광주학생 만세사건이 터졌다. 이 운동은 신 목사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평양까지 번졌다. 평양신학교 1학년 이던 시절이었다. 분연히 동료 학생들과 만세운동에 동참했고 처음으로 감옥생활을 석달간 경험했다. 1919년엔 3.1운동에도 참가했다.
“3.1 운동 당시 저는 14살이었어요. 어른들과 청송에서 ‘만세 만세 만만세, 대한 독립 만만세’를 목청껏 불러대며 20리를 갔어요. 운율이 맞으니 노래처럼 재밌잖아요. 하지만 나이가 어렸으니 그 의미는 잘 몰랐을 겁니다.”
교단과 강단에서
계성중고등학교에서 36년 교목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경과목을 폐쇄해버려 조선어 교육과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 과목들도 탄압과 통제가 심했다.
목회에 전념하기로 했다. 대구 대신교회, 칠성교회, 수성교회, 종로교회, 청산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시무했다.
1969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으로 일했다.
계명대학교 설립 이사도 맡았다. 신 목사는 “초대 이사가 17명이었는데 나 혼자 생존해 있다”고 말했다.
동생 신태식 박사도 계명대 총장을 역임했었는데 지난해 94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미국에 온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없어요. 자식들이 대부분 먼저 와있었거든요.”
연세대 교수로 있는 딸을 제외하고 여섯 아들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79년 도미했다.
“16년간 설교 목사를 했습니다. 워싱턴과 앨라배마, 시라큐스, 애틀란타, 산호세 등에 소재한 한인교회에서 임시 목사로 시무했지요. 교인이 200여명 됐던 애틀란타연합장로교회에서 일년간 있을 때 참 재밌었습니다. 화합이 잘되고 열심히 일하는 좋은 교회였지요. 후에 어려워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워싱턴에는 1991년부터 살고 있어요.”
요즘은 나이가 들고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설교 요청이 없어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려 애쓴다.
나의 마지막 소임
실버 스프링 노인 아파트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는 아내 서봉숙 권사는 올해 94세다.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얼마 전부터 치매 증상이 나타나 근심거리다.
“잘 기억을 못해요. 젊을 때 나를 위해 무척 고생한 사람입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도 그랬고 7남매를 키우느라 힘들었습니다. 또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와줬어요.
아내를 잘 돌봐주는 일이 제 마지막 소임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주는 아주머니가 있습니다만 제가 늘 곁에 있어요. 아내가 아프면 가끔 교회를 못 갑니다.”
“교회는 이민사회의 희망”
신 목사 자신은 평소 건강에 문제가 없었는데 요즘 척추에 신경통이 생겨 지팡이를 이용하고 있다. 혈압과 위장도 조금 나빠졌다. 그래도 아직은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볼 정도.
인터뷰 말미에 신 목사는 특별한 뉴스가 있다며 조그마한 수첩을 품에서 꺼냈다.
“메릴랜드 백세위원회(Cente nnial Committee)에서 연락이 왔어요. 백세 이상을 산 사람들이 갖는 모임인데 초청했는데 왜 안왔느냐구요. 내년 5월17일 다시 모이니 꼭 오라구 합디다. 글세 메릴랜드에만 100세 이상의 주민이 1,000명이 넘는다나. 그러니 나같은 사람 이상할거 없지.”
그는 광무 9년(1905년) 대한제국 에서 태어나 얼마후 일본 국민이 됐고 해방후 다시 대한민국 사람이 됐다가 이제는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장수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등신 같이 살아 그렇지 뭐”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신 목사는 늘 비우며 남을 위해 살았던 삶의 철학을 교회에 대한 당부의 말에 담았다.
“복음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열심은 있는데 세속주의에 빠졌어요. 물량과 성장에만 치중하고 세상 잡념이 마음에 가득해요. 이런 것들을 버려야지. 미련하게 전도해야 교회가 잘돼요”
신후식 목사 약력
1905년 청송에서 태어난 신 목사는 계성중학교,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를 나와 계성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구중학교, 성명/신명여자고등학교, 계성중고등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계명대학교 초대 이사도 맡았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를 26년간 담임했던 이원상 목사, 두레 공동체의 김진홍 목사도 현재 계명대학교 이사로 있다.
교계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경북노회장을 지낸 후 69년과
70년 당시 교단내 50만 성도를 이끄는 총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병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