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르고 싶은 어머니

2005-05-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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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머님이다. 내가 정성을 다 바쳐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어머님이다. 밤을 세워 지나간 이야기를 아낌없이 나누고 싶은 정든 사람도 물론 어머님이다.
꿈에서라도 어머님 얼굴을 보고 싶다. 먼발치에서나마 한번만이라도 쳐다보고 싶다.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음성을 단 한마디라도 들어보고 싶다.
언젠가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아픈 발가락을 본 적이 있었다. 발가락 살 끝마다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우리 6남매를 홀로 키우시느라고 밤낮 없이 뛰어다니신 상흔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딱딱한 발가락의 기억 때문에 가슴이 아 프다.
내가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을 때였다. 어느 일요일 면회 마감 시간이 거이 다 끝날 무렵이었다. 누가 면회 왔다고 했다. 나에게는 면회 올 사람도 없고 그런 상황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님이 심청이 아버지처럼 마지막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 멀고 복잡한 초행길을 순전히 정성 하나로 찾아 오셨다. 삶은 닭고기와 내의 한 벌 그리고 손수 빚은 떡하고 내가 좋아한 책이었다.
그 짧은 면회 시간에 어머니는 계속 내 손을 꼭 쥔 채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어머님은 그날 밤은 근처 여관에서 머물고 내일 기차로 떠나신다고 했다. 차라리 면회를 오지 않으셨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찡 하지는 안 았을텐데, 아무리 참으려 해도 나도 솟구치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 었다.
연신 뒤를 돌아보시며 손수건을 적시던 어머니,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내무실에 들어와 내의를 보며 나는 또 한번 울었다. 내의 속에는 입이 좁은 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속에 몇 장의 지폐가 몰아져 있었다. 나에게 비상금을 주신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만든 돈이 분명할 텐데 다시 돌려 줄 방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강인한 어머님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대성통곡하신 것을 처음 본 적이 있었다. 큰며느리의 죽음 앞에 그렇게 오열하며 설움에 복받쳐 실신하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 당시 형님이 평생 어머니 고생만 시켰는데 자식 노릇 제대로 한번 못해 보았다고 미국으로 모셔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 가신 뒤 일 개월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불쌍한 어머니! 평생 자식을 위해 죽도록 고생만 하시다가 가신 어머니! 평생 눈물겨운 희생만 하시다가 외롭게 떠나신 어 머니!
여행이라도 한번 손잡고 해보았더라면, 마음놓고 속 시원히 웃으시는 모습이라도 보았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메이지 않으련만 그저 안타까운 눈물만 흐를 뿐 이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모시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인생의 덧없음이 새삼 가슴에 저미어 온다.


고영주/ 한국어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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