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간다가 다음의 한국?

2005-04-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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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선교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는 16살인 조카가 우리와 함께 갈 것이다. 지난주 전화 통화 중 조카는 벌써부터 아프리카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크리스 삼촌, 텔레비전에서 아프리카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어요. 우간다에 크리스천들이 많다고 해요. 5만 명이 넘는 교회가 있다고 하여 놀랐어요. 우간다에 가서 우리 그 교회를 방문할 거예요?” 하고 물었다.
조카가 말하는 그 교회가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미러클센터라고 짐작하며, “그래, 기회를 만들어서 그 교회를 방문하자”고 말하였다.
전화를 끊은 후 조카와의 대화가 30여년 전 그의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국에서 1974년 평화봉사단 임무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동생이 나에게 한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신문에서 읽었다고 하면서, 자세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교인이 5만명이나 되는 큰 교회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날 더러 그 교회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마 서울에 있는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교회를 말하는구나” 하고 짐작하였다. 동생은 미국만이 초대형 교회들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았다.
70년 초에 대부분의 미국 크리스천들은 기독교 부흥이 아시아의 조그만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한국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그 마을에는 내가 믿는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학교동료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마을에 작은 미션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교인은 수 십명 정도였다. 남자들이 오른쪽에 앉고 여자들이 왼쪽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였다. 우연히 길거리 현수막을 보고 나는 빌리 그래엄이 여의도 광장에서 설교하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아스팔트 광장에 발 디딜 틈이 없이 들어선 헤아릴 수 없는 인파 속에서, 빌리 그래엄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들릴까 말까하였고 그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1974년 서울에서 열린 빌리 그래엄 전도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기록을 남겼다. 이 거대한 모임은 한국 기독교 부흥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진 행사라고 지금도 자주 거론된다. 나 자신이 알지 못한 채 나는 한국의 역사적인 장면의 증인이 된 것이다.
32년 후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금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부흥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케냐, 탄자니아, 르완다, 그리고 우간다 같은 나라에서 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2001년에 나는 캄팔라에 있는 빅토리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의 친구는 2,000명이 넘는 그 교회의 부목사였다. 2003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제2 빅토리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하고 있었다. 제1 빅토리교회에서 2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다. 2004년 캄팔라를 방문하였을 때 나는 제3 빅토리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
동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나 이와 같은 변화를 볼 수 있다. 교회에는 앉을 자리가 없고, 시내버스에서는 젊은이들이 성경을 읽고, 호텔 TV는 기독교 방송을 항상 틀어놓고 있다.
2005년 현재는 서울시민보다 더 많은 비율의 캄팔라 시민들이 교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말 할 수가 없다.
기독교 부흥의 바람이 영국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불어와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간 것일까. 그 바람이 지금 우간다에서 세차게 불고 있는 것은 아 닐까.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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