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랍권의 서광

2004-12-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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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태 이후 나는 매년 한번씩 회교 극단주의가 힘을 잃고 있다는 칼럼을 써왔다. 극단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어떤 나라에서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왔다.
많은 나라 국민들이 자기 정부와 미국까지 경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즘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종교적 극단주의를 가능케 하는 정치 엔진에 김이 빠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 활동이 개방된 지역에서는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올해 선거에서 비종교 정당이 회교 정당을 압도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바다위 총리는 국민들이 회 율법을 시행하는 것보다 부패를 일소하는데 관심이 많다고 판단,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결과 회교당은 30년 래 최악의 패배를 맛봐야 했다.
2004년에는 근본주의에 대한 지지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미미하지만 개혁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몇몇 정부는 경제는 물론 정치 개혁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요르단은 진지한 경제 개혁을 시작했으며 아랍권에서 가장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집트도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추진력이 있는 새 총리가 첫 비즈니스맨 출신 각료를 임명하는 등 개혁 정치를 펴고 있다.
이들이 마련한 개혁안은 대담하고 장기적인 것이다. 그 결과 이집트 주식시장은 올 들어 100%나 올랐다.
초기의 열기는 쉽사리 식을 수 있다. 아랍권의 엘리트는 개혁에 결사 반대하고 있으며 어떤 변화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수세에 몰려 있다. 처음으로 이들과 다른 의견이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지난 10일 간 열린 두 회의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 번째 회의는 모로코에서 열렸다. ‘미래를 위한 포럼’이란 제목이 붙기는 했으나 이들은 팔레스타인 국가가 창설되고 이라크에서 외국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참석한 이 지역 외무장관들의 의견이었다.
이는 아랍권이 항상 내세우는 이상한 핑계다. “외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지겹다는 아랍권의 새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두바이에서 열린 ‘아랍 전략 포럼’이 그것이다. 두바이의 지도자인 막툼은 “심각한 외교적 위기가 있다 해도 경제 개혁이나 문맹 퇴치를 늦출 까닭이 없다. 외교와 부패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개혁 목소리는 페르샤만 연안국에서 주로 나오고 있다. 두바이는 경제 개혁이 효율성에서 인근 나라를 훨씬 앞서 가고 있다. 카타르와 바레인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는 과거와는 정반대 현상이다. 50년대와 60년대에는 이집트를 필두로 한 대규모 아랍 국가가 개혁의 선두에 섰었고 걸프 연안국들은 후진 유목민 사회였다. 그러나 이제 경제 발전은 걸프 연안국이 선도하고 있고 시리아는 석기 시대로 쳐져 있다.
이집트의 개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아랍권은 개혁 위주의 소국과 굼뜬 대국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범 아랍주의는 원래부터 픽션에 불과했으며 아랍권의 발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들 나라간의 경쟁이 각 국으로 하여금 미래에 초점을 맞추게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성공하면 나머지는 뒤를 따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과 정치보다는 문화와 상업 교류로 맺어진 새로운 아랍권이 출범할 것이다. 이것이 실현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리겠지만 시즌이 시즌인 만큼 아랍권에 일말의 서광이 보인다는 데 감사하자.

파리드 자카리아/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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