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입식품 시장 이대론 안 된다

2004-11-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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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내팽개친 상혼에 소비자만 골탕

“유해” 지적에 시정커녕 돈벌이에만 혈안
당국의 책임 떠넘기기도 편법·탈법 조장
먹거리 안전 위해 소비자 고발의식 절실

광우병 논란이 다시 불거지자 미 당국은 일파만파를 고려해 기민하게 대응했다. 먹거리 안전에 대한 국민의 높은 의식을 즉각 반영했다. 우리가 즐겨먹는 수많은 한국수입 식품들도 안전지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불안요소를 안고 있으면서도 시장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LA인근의 창고 지대에 밴이 1대 서 있었다. 밴 밑으로 검붉은 액체가 흥건했고 악취가 진동했다. 인근 업소에서 일하던 히스패닉이 냄새를 참지 못해 밴에 다가갔다. 액체는 생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인 몇 사람이 생선을 밴에 가득 실어와 소금을 치는 등 ‘알 수 없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히스패닉은 하도 이상해 카운티 보건당국에 전화를 했다. 당국자가 현장에 나왔다.
이 당국자는 한창 ‘작업’을 하던 한인에게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다. 한인은 오래된 생선을 소각하려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조사관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버릴 생선을 왜 잘게 썰어 소금을 뿌렸는지 추궁하고는 생선들을 모두 폐기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꿍꿍이속이 있던 한인은 달리 방도가 없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이 한인은 여기서 굴복하지 않았다. 며칠 뒤 LA에서 멀리 떨어진 제 2의 장소에서 같은 ‘작업’에 돌입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생선을 잘게 썰어 진짜 상품처럼 위장해 소각했다. 한국에서 들여오다 통관심사에서 문제가 돼 폐기명령이 내려진 식품을 버리기 아까워, 대신 생선으로 이 식품을 흉내내 만들어 폐기한 뒤 “진품을 폐기했다”고 할 심산이었다. 어떻게든 당국의 지시를 어기고 인체에 유해할 수 있는 식품을 유통시키려 한 대담한 행동이다. 소비자의 건강은 안중에 두지 않는 차가운 상혼이다.
정도를 벗어난 일부 식품 수입과 유통은 고갈되지 않는 수요 덕에 끊이지 않는다. 일단 수입해 오기만 하면 잘 팔리는데 한국에서 들여오자니 미국 규정에 위반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름을 교묘하게 바꿔 들여온다. 번데기가 좋은 예다. 리어카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파는 번데기를 사먹던 향수를 잊지 못하는 한인들에게 번데기는 ‘고향의 맛’이다.
그러나 번데기는 제 이름으로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어 낚싯밥으로 개명한다. 먹어서 탈이 없으면 그만 이랄 수 있지만 낚싯밥을 먹었으니 탈이 나도 하소연하기가 막막하다. 게다가 번데기는 중국산이 상당수다. 게에 납덩이를 넣어 판 중국상인들을 떠올리면 그 좋아하던 번데기도 왠지 꺼려진다. 얼마 전 터진 ‘쓰레기 단무지 파동’을 떠올리면 더욱 개운치 않다.
뚝배기도 그렇다. 음식을 넣고 팔팔 끓여 구수한 맛을 내지만 뚝배기는 식용도구로는 수입이 어렵다. 표면에 바른 유약의 유해가능성 때문이다. 그래서 개밥그릇으로 들여온다는 게 업계의 얘기다. 당장 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몸에 해를 끼칠 지 아무도 모른다.
식품 수입에는 인체의 유해 여부가 중요하지만 환경에 미치는 부작용도 고려된다. 소비자의 건강에 무신경하니 환경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몸에 좋다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한민족이니 보양 식품을 들여와 팔려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한 때 소란을 피웠던 ‘가물치 사건’이 그것이다.
한국에서야 전통적으로 보양어류로 대접받는 가물치라 양어장에서 기를 정도지만 미국에서는 한국의 황소개구리처럼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수중괴물로 박멸 대상으로 찍혀 있다. ‘퇴치 캠페인’의 표적이기도 하다. 그런 가물치를 바다농어라고 속여 반입한다. 그리고 나중에 찾아내기 위해 상자에 특정 표시를 해 놓는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또 적발됐을 때 머리를 굴려 ‘문화 차이’로 합리화하려들지만 통하지 않는다. 가물치 수입상이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해 이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건강식품을 유난히 밝히는 한인들의 식습관을 감안하면 유사한 사건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다.
수입식품의 문제가 쉽사리 개선되지 않는데는 군소업체의 난립에도 어느 정도 기인한다. 미국의 경우 ‘유나이티드 웨스턴 그로서리’가 중심에 떡 버티고 서서 시장의 안정을 도모한다. 일본 커뮤니티는 대형업체들의 장악력이 뛰어나 시장의 체계화에 기여한다. 이에 비해 한인 커뮤니티는 한국에서 식품을 수입하는 대형업체가 있지만 아직 시장질서를 확립하기엔 역부족이다. 군소업체는 LA에만 30-40개에 달한다. 일부 보따리 수입상까지 합하면 더 많다. 수입 시장의 체계화는 요원해 보인다.
군소업체가 난립하는 것은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수입식품 규모는 연간 2억 달러에 달한다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식품 종류는 2,0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조그만 업체가 뛰어들만한 ‘황금 시장’이다.
생산단가를 낮추려고 한국의 하청공장에서 생산해 수입하는 경우도 있다. 하청업체의 위생에 문제가 생겨도 대처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수출용에는 한국 당국도 미지근하게 대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이 적발됐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생산된 동일한 상품이 LA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한국은 떠들썩했는데도 이곳은 그저 불구경하 듯 잠잠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미국 가는 상품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는 한국 당국자의 발언이다.
그렇다고 미국 당국이 적절히 방어하는 것도 아니다. 9.11 테러 이후 ‘바이오 테러 법(Bio Terrorism Act’ 제정으로 통관을 까다롭게 한다지만 ‘뛰는 정부’ 위에 ‘나는 상인’이 있다. 또 연방식품의약국과 LA카운티보건국은 걸핏하면 소관업무가 아니고 인력이 부족하다며 책임을 전가한다.
수입식품 유해정도를 조사하기 위한 샘플링도 2% 정도에 불과하다.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이다. 한술 더 떠 일부 업소에서는 아예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에 마치 새 것인 양 새 ‘딱지’를 붙여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으니 ‘옛 맛’을 느끼려는 순진한 소비자들만 골탕을 먹는다.
소비자 고발 창구를 열고 있는 한인가정상담소에 따르면 제품과 관련한 고발 건수는 지난 1월부터 10월까지 85건으로 이 가운데 약 10%가 식품에 대한 것이다. 어림잡아 한 달에 1건 정도다. 고발할 것이 별로 없어서라기보다 한인들이 고발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소비자의 ‘무의식’은 불량식품 유통을 방조한다.
식품수입의 부적절한 관행은 당국의 철저한 단속, 소비자의 고발정신, 봉사단체들의 계몽 사업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식탁의 안전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수입상과 판매상의 양심 회복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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