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참정권 공청회

2004-11-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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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5일 추수감사절. 썰렁해야할 추수감사절에 유독 한인타운만 북적댄다. LA타임스 1면에 사진과 함께 게재된 기사의 도입부분이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LA 한인타운의 가정집에서 고성이 들린다. 형제 자매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치 얘기를 하다 설전이 벌어졌다. 12월 29일, 한 달도 채 안 남은 17대 한국 대통령 선거를 놓고 지지 후보를 편드느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침을 튀긴다.
휴일인데도 한인타운은 거리마다 대선 후보 지지 캠페인으로 어수선하다. 한국의 각 후보측이 막판 표 몰이를 위해 대표단을 파견해 가두 캠페인에 동참했다. “우리가 남이냐”며 사탕발림한다. 선심성 공약이 난무한다.
한인들은 “기분 괜찮은데” 하며 후보측의 90도 인사를 받는다. 대선을 앞두고 한인들의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다. 법개정으로 참정권을 부여받은 한인들은 모처럼 대접받는다는 기분에 들떠있지만, 그 대가로 가족마저 서로 얼굴을 붉히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기사 내용은 계속된다. 한인사회 반목이 극에 달하자 일각에서 참정권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타운내 한 교회에서 공청회가 열렸다.
참정권과 관련한 첫 번째 논점은 사회 분열이다. 참정권 반대 발언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선거 때만 되면 한인사회가 갈라진다. 참정권이 없던 시절에는 그런 대로 뭉쳤는데 투표권을 인정받으면서부터 편가르기가 기승을 부린다.” 참정권 찬성 발언자 차례다. “어느 나라나 선거를 치르려면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선거를 치름으로써 사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
또 다른 이슈는 참정권이 미국생활 적응에 도움을 주느냐 하는 문제다. 반대측의 두 번째 발언자가 나왔다. “한국 정치에 한인들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민생활 적응을 방해하는 비생산적인 일이다.” 찬성 측 두 번째 발언자의 응수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미국생활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한국에서 제 목소리를 내느냐 하는 것은 미국생활에도 영향을 준다.”
참정권이 소위 해바라기성 인사들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도 시빗거리다. 반대측 세 번째 발언자가 목청을 돋운다. “일부 단체장들에게 봉사업무는 안중에 없다. 본국 정치인이나 실력자들과 결탁해 참정권을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는 징검다리로 악용한다.” 찬성 측 세 번째 발언자도 밀리지 않는다. “참정권을 개인적 야망 실현의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인들이 단체장 선거 등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일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참 봉사자를 뽑을 수 있다.”
참정권과 한인사회 위상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 반대측 네 번째 발언자는 “한인들이 한국 선거에만 열을 내니 미 정치인들이 한인들을 등한시하게 된다”고 볼멘소리다. 찬성 측 발언자는 손사래를 친다. “LA에 오면 립 서비스하기에 급급한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참정권밖에 없다. 미 주류사회도 참정권을 행사하는 한인들의 열기를 높은 정치적 관심으로 해석하고 활용하려 들것이므로 외면 당할 리 없다.”
LA타임스는 공청회 현장을 다루면서 ‘건설적인 토론장’이었다는 평으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이 기사는 물론 가상이다. 지금 한인들은 참정권이 없다. 그런데 한국 정계 일각에서 참정권 부여가 거론되고, 한인회 등이 참정권 제한은 위헌이라며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타운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도 명확한 입장표명은 아니지만 이 사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참정권의 잠재적 수혜자들은 조용하다. 한인들이 이 이슈에 대한 공방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는 것이다. 쟁점에 대한 인지도도 낮다. 밥지을 가마솥은 차가운데, 엉뚱한 솥에 불이 타오르는 격이다. “참정권을 달라” “위헌이다” 하기 전에 한인들의 중지를 모으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한인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한 전문가들의 고견을 청취하는 자리가 빈번할수록 유익하다. 다수의 한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먼저 헤아린 뒤 캠페인을 전개해도 늦지 않는다. 오히려 수순을 제대로 밟아야 일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 LA타임스의 가상 기사에 나오는 참정권 공청회가 바로 지금 열려야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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