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섬뜩한 미국식 모델

2004-09-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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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과 파월 국무장관이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조치가 러시아의 유약한 민주주의를 고사시키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미국이 러시아의 반민주적 조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은 분명히 했다.
푸틴의 조치는 과거 제정 러시아의 독재권력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추세를 중화시키는 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 그러나 목청을 돋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최근 미국의 정책을 되돌아봄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행동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수주 동안 러시아 국민들은 9.11에 버금가는 테러의 희생을 감수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유사한 국면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 9.11 이후 취한 행동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할 것이다.
미국은 일방주의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방법은 밀려났다. 정부의 다른 과제도 테러와의 전쟁에 종속되는 형국이다. 네오콘들로 주축을 이룬 세력은 선과 악, 우리편 아니면 우리의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됐다.
네오콘은 테러 같은 현상에 대해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로 본다. 네오콘들은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막지 못한 점을 구실로, 당장 무력을 사용하고 그 결과는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도 된다는 식이다. 결과는 뻔하다. 국제사회의 여론은 들을 필요가 없으며 오직 군사력으로 목적을 수행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미국이 이러한 시각에 입각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다면 지난 50여 년 간 미국이 취해 온 정책의 기본노선을 깨는 것이고 러시아로 하여금 유사한 길을 걷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체첸에 대한 러시아의 행동에 미국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러시아는 또한 미국이 9.11을 다른 정책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잘 보았다. 미국은 중동을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한 1990년대 중반부터 짜 놓은 계획대로 이라크를 공격하고 후세인을 제거했다. 대량살상무기와 후세인의 알카에다와의 연계를 근거로 들어서 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근거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이미 판명됐다.
미국의 네오콘이 9.11을 핑계로 이라크를 침공했듯이, 푸틴도 러시아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민주화를 질식시킬 수 있다.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도 미국의 9.11 이용이 모델이 될 수 있다. 세계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조나단 클라크/LA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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